큰 바위가 저기에
이윤주 개인전
일시 | 2026. 9. 15 – 9. 28
| 오프닝 6 pm (행사 없음) , 9. 21 (휴관일)
장소 | 온수공간
관람 시간 | 12 - 8 PM
* 관람료는 무료이며 별도의 예약 없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관람료는 무료이며 별도의 예약 없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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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바위가 저기에 있다. 마치 누벨바그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에 띈 바위를 보며 ‘나에게 달려올 것 같아’라고 나지막이 말해본다. 저기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거스를 수 없는 삶의 흐름이자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무거운 짐덩이를 암시한다. 그것은 나에게 실체 없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는 빈틈없이 자리 잡고 서 있기에 그저 그 곁에 가만히 기대어 압도당할 뿐이다. 바위는 나의 어두움 슬픔 좌절 고통 가장 밑바닥이며, 동시에 나의 사랑 웃음 행복 나를 지켜주는 안전한 벽이다. 매 순간 나를 가로막는 끈질긴 불청객이지만 또한 나의 전부, 모든 시간, 존재의 기억인 것이다. 나는 이 돌덩이로 인해서 끊임없이 삶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결핍은 내가 제대로 살고자 하는 온전함의 시작이며, 매일 밤 꾸는 꿈의 근원이 되어 주는 것이다.
미친 사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한 인간의 치열한 저항과 그로 인한 고통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수기는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삶을 보여주고 선택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성찰하게 되지만 또한 삶을 둘러싼 장막(帳幕)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 마치 생의 이물질 같은 자아를 바로 ‘황야의 이리’라고 부르며 두 개로 나뉜 자아를 어떤 식으로든 통합하고자 한다. 그 균열과 간극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회복하고자, 진정으로 살고자 치열한 여정을 보내게 된다. 나는 바위를 발견하고 그림으로서 존재자의 복수(複數) 자아를 담아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하나로 모을 수 없는 것들을 모아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많은 것이 있고 그럼에도 나의 안(內)은 꼭 내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숱한 관계와 기억들로 만들어진 자아 정체성은 마치 멀리서 보면 하나의 빛이지만 진정으로는 여러 점 조각으로 이루어진 별과 비슷한 형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개별성은 완성되고 파괴되기를 반복하며 제각각의 빛처럼 부유하고 있다. 황야의 이리는 극단적으로 두 개의 자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자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개란 것은 양극단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 글에서 나조차도 지속적으로 대비되는 두 가지의 경우를 늘어놓으며 천 개(셀 수 없는)의 바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지불하고 입장할 수 있는 마술극장은 황야의 이리에게 모순과 결핍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 깨우쳐 나가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쉽게 깨칠 수 있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바위처럼 압도적이고 강렬한 경험을 통하여 분명 전과는 달라졌을 테지만 여전히 황야의 이리로 세상을 떠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깨닫고자 하는 삶의 숙제들이 있을 것이라 그것이 각자 일상의 중요한 부분들을 불편하고 초라하게 만들지라도 쉽게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황야의 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 속의 바위는 그와 함께 고독하고 외롭게 존재하고자 한다. 또한 그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커다란 바위의 의미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누군가 그 바위를 응시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롤랑 바르트식 푼크툼(punctum)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하나의 인상이 들이닥치기를 고대한다.
내면으로 가는 흐릿하고 가느다란 길은 개인성의 상실과 실존의 문제, 자아를 회복하려는 열망과 뒤엉켜 깊은 심연 속에 숨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무언가 진정함을 찾기 위해서는 집요하고 비판적인 자아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하나도 무겁지 않게 시나브로 지나가고 내 두 손에 아무런 무게감을 주지 않아 한발씩 꾹꾹 즈려밟으며 살고자 하여도 공백은 순식간에 쌓여만 간다. 나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갈래길에서 왼쪽으로 코너를 돌아(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지금에 다다르는 동안에 시간의 균탁(龜坼)과 비척거리는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그때는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틀리게 되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숱하게 많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정말이지 잔인한 것이며 작업 역시 그와 궤적을 함께 한다. 내 작업의 시작점, 본질부터 찬찬히 더듬으며 틀리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한참을 멈추어 있던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보니 ‘바위’라는 단일한 ‘이미지’만이 남겨졌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공기 중으로 기화하여 바위 너머로 사라져갔다. 마치 황야의 이리가 겉으로 보이기에는 특정한 자아를 상징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실상은 셀 수 없는 경우의 수를 가진 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커다란 바위는 무수(無數)를 내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한 마리의 이리처럼 하나의 바위는 고요하게 포효한다.
저기의 큰 바위는 그림 속에서 많은 것들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온갖 무겁고 가벼운 것들, 타인의 말간 얼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바위는 단단히 놓여 나를 가로막지만 동시에 나를 보호하고 북돋우는 존재이다. 이러한 압도적이고 복합적인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많은 고민이 뒤따르게 된다. 두터운 질감과 명료한 터치감, 추상적인 색면과 함께 세부적인 디테일 묘사를 통하여 하나씩 구체화 시켜본다. 더욱이 주로 사용하던 재료에서 다른 것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회화적 면모를 찾아내 보고자 한다. 나의 화면에는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위가 아닌 것은 없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도 없는 채로 그들이 달려오게끔 보여주고자 한다. 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바위의 모습만으로 표현하여 집약적이고 순수한 감성을 더하는 것이다. 또한 그림의 제목도 없는 편에 가깝다. 네 자릿수의 숫자까지 무작위로 이루어진 제목은 지상의 셀 수 없는 돌을 가리키는 임의의 번호가 되어 준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일부러 꾸미거나 뜻을 더하지 아니한다. 바위는 거대한 메타포이지만 그것은 외연( 外緣)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보고 느낄지는 그 누군가가 결정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그린 것처럼. 작업에 대한 글은 항상 어렵고 모자란다. 때로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기분이 들곤 하여 그 의미와 역할을 반문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성의 있게 쓰는 과정을 통하여 다시금 새롭게 배우고 깨닫는 점들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기를, 그리고 황야의 이리가 그렇게 선택했던 것처럼 오롯이 끝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_작가노트, 이윤주
커다란 바위가 저기에 있다. 마치 누벨바그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에 띈 바위를 보며 ‘나에게 달려올 것 같아’라고 나지막이 말해본다. 저기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거스를 수 없는 삶의 흐름이자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무거운 짐덩이를 암시한다. 그것은 나에게 실체 없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는 빈틈없이 자리 잡고 서 있기에 그저 그 곁에 가만히 기대어 압도당할 뿐이다. 바위는 나의 어두움 슬픔 좌절 고통 가장 밑바닥이며, 동시에 나의 사랑 웃음 행복 나를 지켜주는 안전한 벽이다. 매 순간 나를 가로막는 끈질긴 불청객이지만 또한 나의 전부, 모든 시간, 존재의 기억인 것이다. 나는 이 돌덩이로 인해서 끊임없이 삶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결핍은 내가 제대로 살고자 하는 온전함의 시작이며, 매일 밤 꾸는 꿈의 근원이 되어 주는 것이다.
미친 사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한 인간의 치열한 저항과 그로 인한 고통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수기는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삶을 보여주고 선택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성찰하게 되지만 또한 삶을 둘러싼 장막(帳幕)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 마치 생의 이물질 같은 자아를 바로 ‘황야의 이리’라고 부르며 두 개로 나뉜 자아를 어떤 식으로든 통합하고자 한다. 그 균열과 간극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회복하고자, 진정으로 살고자 치열한 여정을 보내게 된다.
나는 바위를 발견하고 그림으로서 존재자의 복수(複數) 자아를 담아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하나로 모을 수 없는 것들을 모아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많은 것이 있고 그럼에도 나의 안(內)은 꼭 내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숱한 관계와 기억들로 만들어진 자아 정체성은 마치 멀리서 보면 하나의 빛이지만 진정으로는 여러 점 조각으로 이루어진 별과 비슷한 형상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개별성은 완성되고 파괴되기를 반복하며 제각각의 빛처럼 부유하고 있다. 황야의 이리는 극단적으로 두 개의 자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자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개란 것은 양극단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 글에서 나조차도 지속적으로 대비되는 두 가지의 경우를 늘어놓으며 천 개(셀 수 없는)의 바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지불하고 입장할 수 있는 마술극장은 황야의 이리에게 모순과 결핍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 깨우쳐 나가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쉽게 깨칠 수 있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바위처럼 압도적이고 강렬한 경험을 통하여 분명 전과는 달라졌을 테지만 여전히 황야의 이리로 세상을 떠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깨닫고자 하는 삶의 숙제들이 있을 것이라 그것이 각자 일상의 중요한 부분들을 불편하고 초라하게 만들지라도 쉽게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황야의 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 속의 바위는 그와 함께 고독하고 외롭게 존재하고자 한다. 또한 그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커다란 바위의 의미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누군가 그 바위를 응시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롤랑 바르트식 푼크툼(punctum)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하나의 인상이 들이닥치기를 고대한다.
내면으로 가는 흐릿하고 가느다란 길은 개인성의 상실과 실존의 문제, 자아를 회복하려는 열망과 뒤엉켜 깊은 심연 속에 숨기를 반복한다. 우리가 무언가 진정함을 찾기 위해서는 집요하고 비판적인 자아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하나도 무겁지 않게 시나브로 지나가고 내 두 손에 아무런 무게감을 주지 않아 한발씩 꾹꾹 즈려밟으며 살고자 하여도 공백은 순식간에 쌓여만 간다. 나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갈래길에서 왼쪽으로 코너를 돌아(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지금에 다다르는 동안에 시간의 균탁(龜坼)과 비척거리는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그때는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틀리게 되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숱하게 많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정말이지 잔인한 것이며 작업 역시 그와 궤적을 함께 한다. 내 작업의 시작점, 본질부터 찬찬히 더듬으며 틀리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한참을 멈추어 있던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보니 ‘바위’라는 단일한 ‘이미지’만이 남겨졌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공기 중으로 기화하여 바위 너머로 사라져갔다. 마치 황야의 이리가 겉으로 보이기에는 특정한 자아를 상징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실상은 셀 수 없는 경우의 수를 가진 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커다란 바위는 무수(無數)를 내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한 마리의 이리처럼 하나의 바위는 고요하게 포효한다.
저기의 큰 바위는 그림 속에서 많은 것들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온갖 무겁고 가벼운 것들, 타인의 말간 얼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바위는 단단히 놓여 나를 가로막지만 동시에 나를 보호하고 북돋우는 존재이다. 이러한 압도적이고 복합적인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많은 고민이 뒤따르게 된다. 두터운 질감과 명료한 터치감, 추상적인 색면과 함께 세부적인 디테일 묘사를 통하여 하나씩 구체화 시켜본다. 더욱이 주로 사용하던 재료에서 다른 것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회화적 면모를 찾아내 보고자 한다.
나의 화면에는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위가 아닌 것은 없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도 없는 채로 그들이 달려오게끔 보여주고자 한다. 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바위의 모습만으로 표현하여 집약적이고 순수한 감성을 더하는 것이다. 또한 그림의 제목도 없는 편에 가깝다. 네 자릿수의 숫자까지 무작위로 이루어진 제목은 지상의 셀 수 없는 돌을 가리키는 임의의 번호가 되어 준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일부러 꾸미거나 뜻을 더하지 아니한다. 바위는 거대한 메타포이지만 그것은 외연( 外緣)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보고 느낄지는 그 누군가가 결정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그린 것처럼.
작업에 대한 글은 항상 어렵고 모자란다. 때로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기분이 들곤 하여 그 의미와 역할을 반문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성의 있게 쓰는 과정을 통하여 다시금 새롭게 배우고 깨닫는 점들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기를, 그리고 황야의 이리가 그렇게 선택했던 것처럼 오롯이 끝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_작가노트, 이윤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