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은신



옥정빈 개인전


일시 | 2026. 2. 27 - 2026. 3. 10

장소 | 온수공간 1F

시간 | 11 AM - 7 PM


* 관람료는 무료이며 별도의 예약 없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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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기, 뒤로 감추기, 어떤 것으로부터 숨는 일.

은신이란 그런 것이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은폐를 위해 만들어진 모습은 또 다른 표면을 낳는다. 외부로부터 나를, 또 나로부터 나의 조각을 숨겨 머물 수 있는 장소를 향한 시도는 행위만을 남긴다. 이 전시는 그렇게 고백과 위장이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낸다.

옥정빈은 지속적으로 신체 이미지를 통한 정서의 표현에 집중해왔다. 작가는 뒤틀리고 무너져 내리는 몸의 묘사를 통해 스스로의 트라우마에 접근한다. 그러면서 관계와 같은 무형의 연결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촉각적 재료와 형태로 은유한다. 이전 작품에서 나타났던 라텍스나 파라핀 등의 재료 또한 몸을 지시하기 위한 물질 실험의 일환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작가의 관심은 꾸준히 몸, 자기인식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에서 사건과 관계된 본인의 정서로부터 거리를 두고 되짚어 나가는 과정과 무의식적 이미지, 비정형의 대상은 모순적으로 공존한다. 이러한 과거 작업이 자기부정성이라는 감각에 머물렀다면, 그 연장에서 이번에는 페르소나를 호출한다.

작업의 기반이 되는 드로잉 기저의 문제의식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트라우마, 무의식, 자기검열과 관계, 이상에 대한 즉각적인 고민들은 다듬어진 단상처럼 축적된다. 전시에서 ‘투명한 은신처’라는 이름으로 엮어낸 드로잉 북은 작업에서 나타나는 사건과 중첩된 시공간을 갈무리하는 동시에 서사를 연장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작가의 기록으로서 그 단상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한편으로 드로잉은 사적인 고백처럼 보이면서도 정제된 구성 속에 배치됨으로써 또 하나의 위장이 되기도 한다. 감추려는 충동과 드러내려는 욕망이 겹쳐지며, 드로잉은 개별 작업들의 기원이자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후 조각과 설치로 확장되는 형상들은 이 사적인 기록의 변주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는 여러 번 다시 만들어지는데, 공간을 서사로 포섭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의 멸망>에서 먼저 나타난다. 오아시스라는 원형의 구획과 메마른 인물상은 작가의 자화상으로,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돌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은 공간의 단색 회화 중 일그러진 동화 같은 이미지의 <트로피 여인> 역시 자화상으로, 사회가 만들어낸 구성물이라는 정체감이 앞의 작업과 공명한다. 그러나 <무의 멸망>이 결국에는 메말라버린 내면을 허구의 상징인 오아시스와 병치하며 존재하지 않는 서사의 장소를 재현했다면, <트로피 여인>은 외부적 압박이 만든 상에 가깝다.

작품의 왜곡된 신체는 과하게 부풀려지거나 가시처럼 말라 있다. 또한 현실적인 죽음의 방법(<악몽: 쫓는 사람>)이나 그 전후의 부패되고 썩은 몸을 간과하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의식을 바꾼다. 덩어리져 분리된 살과 그것이 감싸고 있었던 것 같은 거친 뼈대가 있다. <탈각 인간>은 신체적 감각과 심리적 붕괴 상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탈각은 단순한 붕괴의 장면이기보다, 기존의 외피를 벗겨내는 과정에 가깝다. 벗겨진 몸은 상처를 드러내는 동시에 또 다른 표면을 준비한다. 드러남은 곧 또 다른 은폐의 시작이 되고, 신체는 보호와 노출이 맞닿는 지점 위에 놓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굳은살의 무덤>은 반복된 접촉과 마찰 속에서 형성된 방어의 흔적을 공간적으로 확장한다. 굳은살은 상처를 막기 위해 생겨난 단단한 표면이지만, 그 자체로 이미 지나온 통증의 기록이다. 설치된 구조물은 몸이 머물 수 있는 은신처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굳어버린 시간의 축적을 외부로 드러낸다. 벗겨짐과 굳어짐, 탈피와 축적이라는 상반된 움직임은 방어를 위한 장치이자 끝내는 흔적으로 남는다.

이러한 구조는 신작 <포식자의 만찬>(2026)에서 관계의 장으로 확장된다. 검은 좌대 위에 오른 형상은 스스로를 과시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아래 붉게 얼룩진 작은 존재들과의 대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형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도는 존재들은 힘의 중심을 둘러싼 궤적처럼 읽히며, 관계 사이에 작동하는 위계와 긴장을 드러낸다. 여기서 은신은 더 이상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과의 거리 속에서 취해지는 위치 선정이자,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환된다. 숨으려는 몸은 결국 관계의 구조 속에 배치되고, 그 배치는 또 하나의 형상이 된다.

이처럼 전시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탈각과 굳어짐, 그리고 부풀어 오르거나 말라붙은 신체의 형상들은 모두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장치는 완전한 은폐를 허락하지 않는다. 형상으로 굳어질수록, 공간에 놓일수록, 기록으로 묶일수록 더 또렷해진다. 따라서 전시의 역설적 제목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한다. 은신은 사라짐이 아니며, ‘투명한 은신’은 결국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는 모순을 끝내 회피하지 않는다. 그렇게 숨겨진 몸은 전시라는 장 안에서 하나의 전환으로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