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를 누르는 순간 After-image
2025. 9. 06 - 9. 22
배유림 개인전
김태휘(미술비평)
가족앨범 속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바라보다가 배유림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사진첩에 고이 모셔져 있던 모습을 자신의 휴대폰에 담아두기 위해 작가는 평평한 화면 위로 나타난 셔터 아이콘을 누른다. 이 이미지는 아이패드 드로잉과 함께 장지에 옮겨 그려져 회화 〈행운 중 행운〉(2024)의 바탕이 되었다. 초기의 시도에서 사진 이미지는 희미한 기억처럼 표현되었고, 사진 매체의 특성이나 사실 전달보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기억에 더 주목했다. 개인의 탄생 이전의 이야기이자, 일련의 연작의 출발점이 되는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작업 과정을 설명하는 〈펼치면 사라지는 겁니다〉(2025)과 같은 공간에 놓인다. 〈펼치면 사라지는 겁니다〉는 〈행운 중 행운〉을 포함한 회화 4점의 기반이 된 이미지를 층층이 전사해두어 감상자가 넘겨보며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다양한 천과 종이의 물성, 그리고 안료가 스며든 정도에 따라 위아래의 층위가 흐릿하게 나타나는 형상은 동양화의 겹겹이 쌓아 채색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이외에도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자가 작품과 연결지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바닥에 놓인 카펫 〈기억하는 말〉(2025)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점차 때가 타고 글씨가 지워지겠지만 이러한 과정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기억이 어렴풋하게 점차 희미해지는 흐름과 연결된다. 이 수평적인 캔버스는 감상자들의 움직임의 지표를 통해 최초의 텍스트가 시간과 기억의 흩어지고 얼룩지는 양상을 담아낼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세계와 자신의 접점을 파악한다는 측면을 보인다. 작품의 제목은 개인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감상자에게 작가의 정동을 전달하는 맥락으로 기능한다. ‘잘 부탁드립니다’는 인사말부터 〈친구 사귄 날〉(2025) 등의 작품 제목은 관계의 시작을 그 자체로 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영원은 늘 그러하듯〉(2024)에서 알 수 있듯이 영원에 대한 작가의 소망을 종종 내비친다.
내밀한 서사로부터 시작했던 연작은 보편적인 일상 속 사진으로 옮겨오면서 사진의 지표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와 관련된 자신의 정동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어 감상자가 작품을 읽기 전에 감각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전시는 최근 작업에서 보이는 내용이 분명한 사진부터 희미한 잔상들로 나아가도록 제작시기와 역순으로 배치되어, 감상자들을 서서히 기억을 감각하는 여정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고려되었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순간들이나 흥미로운 이미지가 담긴 사진 파일에 하트 모양의 태그를 달아 언제든 즐겨 찾을 수 있게 선별해두었다.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음에도, 즐겨찾기한 이미지가 약 17,000개에 달하다 보니 때때로 명료하게 기억할 수 없는 문제를 겪게 되었다.1)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가가 가득 쌓인 이미지 중에서 무엇을 고르는지를 바라보게 된다. 달력, 얼음, 떨어진 깃털 등 한시성이 깃든 도상은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워 보이는 기억의 모순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통해 고정하고, 이를 둘러싼 기억과 감정을 얇게 칠을 쌓아 천천히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고 동시에 회상하는 현재의 정동을 담는다. 전반적으로 서늘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묻어나는 색감은 조금씩 사라져가는 시간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트, 별과 같은 상징과 격자 구조는 작가가 2020년대 초부터 주목해왔던 요소로, 동양화의 채색기법뿐만 아니라 전사 인쇄, 스텐실을 통해 양초나 하트 등을 네 개의 귀에 배치를 하는 등 작품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작가의 회화에서 공간과 대상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의 축으로 격자를 활용했던 작품들과 달리, 〈행운 중 행운〉, 〈영원은 늘 그러하듯〉 등에서는 격자 구조가 다른 이미지가 완전히 녹아내리지 않도록 지지해 놓은 얇은 그물처럼 표현된다.
이를테면 〈친구 사귄 날〉(2025)에서는 우측의 사진 이미지가 느슨하게 찍힌 격자 위에 위치함으로써, 이전처럼 고립된 공간이나 대상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유연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림을 에워싸던 격자가 달력이라는 사물로 다시금 환유됨으로써 공간에서 시간적인 차원으로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해석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우주의 천체운동이 시간의 표준을 제공하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외적인 운동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달력은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의 간극을 잇는 다리로 기능한다.2) 기념일처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은 다른 일상보다 더 자세하고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의 서사를 해석해 나가게 되고, 이는 곧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으로 작용한다. 2024년 10월의 달력과 우측에 그려넣은 사진은 새 친구를 사귀게 된 일자를 감상자에게 알려주듯이 말이다. 이와 같은 단서를 통해 우리는 인물의 서사를 관찰할 수 있게 되고, 글씨 위로 가로지르는 불꽃과 물방울을 감각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은 손아귀 안의 모래처럼 서서히 빠져나가겠지만, 작가의 ‘기억법’은 떨어지는 모래알이 빛나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직시하게 한다. 모든 순간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겠지만 작가는 과거를 어떻게 담아낼지, 그리고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소박한 기념을 통해, 과거를 넘어 확장된 세계와의 접점을 제안한다. 어쩌면 우리는 쌓여있는 기억 속 각기 빛나는 순간들을 무심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 배유림, 작가노트2) 폴 리쾨르, 김한식 옮김, 「체험된 시간과 보편적 시간 사이에서」, 『시간과 이야기 3』,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pp. 204-205, 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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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공간 2025 오픈그라운드 공모 당선작 II
김태휘(미술비평)
가족앨범 속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바라보다가 배유림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사진첩에 고이 모셔져 있던 모습을 자신의 휴대폰에 담아두기 위해 작가는 평평한 화면 위로 나타난 셔터 아이콘을 누른다. 이 이미지는 아이패드 드로잉과 함께 장지에 옮겨 그려져 회화 〈행운 중 행운〉(2024)의 바탕이 되었다. 초기의 시도에서 사진 이미지는 희미한 기억처럼 표현되었고, 사진 매체의 특성이나 사실 전달보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기억에 더 주목했다. 개인의 탄생 이전의 이야기이자, 일련의 연작의 출발점이 되는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작업 과정을 설명하는 〈펼치면 사라지는 겁니다〉(2025)과 같은 공간에 놓인다. 〈펼치면 사라지는 겁니다〉는 〈행운 중 행운〉을 포함한 회화 4점의 기반이 된 이미지를 층층이 전사해두어 감상자가 넘겨보며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다양한 천과 종이의 물성, 그리고 안료가 스며든 정도에 따라 위아래의 층위가 흐릿하게 나타나는 형상은 동양화의 겹겹이 쌓아 채색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이외에도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자가 작품과 연결지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바닥에 놓인 카펫 〈기억하는 말〉(2025)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점차 때가 타고 글씨가 지워지겠지만 이러한 과정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기억이 어렴풋하게 점차 희미해지는 흐름과 연결된다. 이 수평적인 캔버스는 감상자들의 움직임의 지표를 통해 최초의 텍스트가 시간과 기억의 흩어지고 얼룩지는 양상을 담아낼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세계와 자신의 접점을 파악한다는 측면을 보인다. 작품의 제목은 개인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감상자에게 작가의 정동을 전달하는 맥락으로 기능한다. ‘잘 부탁드립니다’는 인사말부터 〈친구 사귄 날〉(2025) 등의 작품 제목은 관계의 시작을 그 자체로 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영원은 늘 그러하듯〉(2024)에서 알 수 있듯이 영원에 대한 작가의 소망을 종종 내비친다.
내밀한 서사로부터 시작했던 연작은 보편적인 일상 속 사진으로 옮겨오면서 사진의 지표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와 관련된 자신의 정동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어 감상자가 작품을 읽기 전에 감각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전시는 최근 작업에서 보이는 내용이 분명한 사진부터 희미한 잔상들로 나아가도록 제작시기와 역순으로 배치되어, 감상자들을 서서히 기억을 감각하는 여정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고려되었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순간들이나 흥미로운 이미지가 담긴 사진 파일에 하트 모양의 태그를 달아 언제든 즐겨 찾을 수 있게 선별해두었다.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음에도, 즐겨찾기한 이미지가 약 17,000개에 달하다 보니 때때로 명료하게 기억할 수 없는 문제를 겪게 되었다.1)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가가 가득 쌓인 이미지 중에서 무엇을 고르는지를 바라보게 된다. 달력, 얼음, 떨어진 깃털 등 한시성이 깃든 도상은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워 보이는 기억의 모순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통해 고정하고, 이를 둘러싼 기억과 감정을 얇게 칠을 쌓아 천천히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고 동시에 회상하는 현재의 정동을 담는다. 전반적으로 서늘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묻어나는 색감은 조금씩 사라져가는 시간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트, 별과 같은 상징과 격자 구조는 작가가 2020년대 초부터 주목해왔던 요소로, 동양화의 채색기법뿐만 아니라 전사 인쇄, 스텐실을 통해 양초나 하트 등을 네 개의 귀에 배치를 하는 등 작품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작가의 회화에서 공간과 대상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의 축으로 격자를 활용했던 작품들과 달리, 〈행운 중 행운〉, 〈영원은 늘 그러하듯〉 등에서는 격자 구조가 다른 이미지가 완전히 녹아내리지 않도록 지지해 놓은 얇은 그물처럼 표현된다.
이를테면 〈친구 사귄 날〉(2025)에서는 우측의 사진 이미지가 느슨하게 찍힌 격자 위에 위치함으로써, 이전처럼 고립된 공간이나 대상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유연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림을 에워싸던 격자가 달력이라는 사물로 다시금 환유됨으로써 공간에서 시간적인 차원으로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해석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우주의 천체운동이 시간의 표준을 제공하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외적인 운동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달력은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의 간극을 잇는 다리로 기능한다.2) 기념일처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은 다른 일상보다 더 자세하고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의 서사를 해석해 나가게 되고, 이는 곧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으로 작용한다. 2024년 10월의 달력과 우측에 그려넣은 사진은 새 친구를 사귀게 된 일자를 감상자에게 알려주듯이 말이다. 이와 같은 단서를 통해 우리는 인물의 서사를 관찰할 수 있게 되고, 글씨 위로 가로지르는 불꽃과 물방울을 감각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은 손아귀 안의 모래처럼 서서히 빠져나가겠지만, 작가의 ‘기억법’은 떨어지는 모래알이 빛나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직시하게 한다. 모든 순간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겠지만 작가는 과거를 어떻게 담아낼지, 그리고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소박한 기념을 통해, 과거를 넘어 확장된 세계와의 접점을 제안한다. 어쩌면 우리는 쌓여있는 기억 속 각기 빛나는 순간들을 무심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 배유림, 작가노트
2) 폴 리쾨르, 김한식 옮김, 「체험된 시간과 보편적 시간 사이에서」, 『시간과 이야기 3』,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pp. 204-205, 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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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공간 2025 오픈그라운드 공모 당선작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