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   ) 있어요





2025. 2. 13 ― 2025. 2. 28



장소 | 온수공간 1 - 3F
관람시간 | 12 - 7PM

참여 작가|김다슬, 김보경, 김진선, 김현민, 박희민, 옥정빈, 이고은, 이용현, 이주은, 채은교
글 | 주수빈
디자인|
김진선
후원 | ESAarts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전시는 온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이자 작품이 스스로 해설을 제공하는 <여기 ( ) 있어요>와 함께 작품의 동선을 따라 감상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전시는 특정 전설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이 과거나 미래로 떠나고 사물만 남은 세계를 설정하며, 온수 공간을 시간과 차원의 통로로 구성한다. 공간은 칸칸이 나뉘어 있으며, 전시 전반에 걸쳐 참여 작가가 각각 선택한 실로 만든 뜨개 공이 공간마다 배치되어 개별 작품들을 연결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전시 제목의 괄호 안에는 다양한 의미(나, 우리, 사람, 예술작품 등)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부재’와 ‘현재성’을 탐구한다. 결과적으로, 존재와 시간의 개념을 새롭게 조명하며, 현재에 남아 있는 것들의 의미를 환기하는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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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 옆에 비치된 책자는 온수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쓰인 한 편의 시나리오이자, 자신을 어 떻게 보아야 할지 작품이 스스로 그 지침을 제공하는 작품 설명서이기도 하다. 책자와 함께 전 시를 먼저 감상한 후 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전시에서 필자는 참여작들을 엮으며 얻게 된 단편적 통찰들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 내부에 국한했을 때의 이야기는 미완의 것으로, 그것은 텍스트 외 부의 현실-온수 공간이라는 특수한 장소 및 작품들과의 병치-과 접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 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시공간적 맥락은 재편되며, 그로써 이곳 온수공간은 하나 의 거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온수공간은 본래 오래된 주택이다. 주택은 사람의 거주지이다. 인간이 부재한 세계에 남겨 진 사람의 거주지는 어떤 모습일까. 텅 비어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그곳을 채우 고 있을까? 이야기는 그러한 심상에 착안해 구상되기 시작했다.

현대식의 가벽과 구조물들을 덧씌운 과거의 오래된 건축 구조와 미래로 이행하는 길목에 위 치한 동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한데에서 어우러지는 이곳 온수공간을 거닐다 보면, 과거와 현 재, 미래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이해되는 세간의 시간 관념으로부터 이탈하여, 문득 시간이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한 비일상적 감각을 야기하는 이곳을 배경으로 쓰인 '여기() 있어요'는, 선형적 시간 관이 실제로 허물어져 과거나 미래, 그 어디로든 넘나들 수 있는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안에 남아있는 작은 개별 존재자들의 존재 방식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러한 현재적 이어쓰기를 통해 '지금-여기(의)-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색다르게 조명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서있는 이곳 온수공간에 지금-여기(의)-우리를 이해하는 새 길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 전시를 준비했다.








텅 빔과 동시에 가득 차 있는 신묘한 세계로
뛰어들 준비가 완료되면, 다함께 숫자를 세보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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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이십사
이천이십오


지금부터 당신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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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사물들만이 남은 세계를 홀로 거닐고 있다고 상상 해보자. 경계의 틈 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 작은 공에 대한 전설을 배경으로, 지구에서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자 모든 사람들이 과거나 미래로 떠나버리고 현재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기묘한 시공간적 설정에서부터 이야기는 출발한다. 여기서 이곳 온수 공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차원의 통로가 된다.

공이 당도한 곳은 어느 집이었다. 전시장의 1층 초입에 있는, 김다슬의 <테라폴리스의 하늘 >앞에서 그의 여정은 시작된다. 이야기의 화자인 '공'은 그 테라폴리스의 '하늘'에서 온 존재 자로, 우주의 테라포밍된 다른 행성에서 <테라폴리스의 하늘>이라는 그림을 매개로 하여 차원 이동을 한 '공'이, 이곳 지구의 온수공간을 거닐며 이곳에 있는 작품들과 나누게 되는 대화가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포맷이다.

처음에 당신은 이 이야기를 어린 시절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이, 의미를 종합 적으로 엮어내기 어려운 뒤죽박죽의 수수께끼처럼 느낄 수도 있겠다. 시나리오의 초입에 등장 하는 '전설'에서의 울타리가 그러했듯, 전시장은 칸칸이 나뉘어져 구성되어 있고, 작품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외따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칸막이 너머로, 정체 모를 뜨개 공이 전시장 내의 모든 구간마다 놓여 있다. '전설'에서 보았던, 울타리들의 틈새 사이로 굴러 들어갔던 작은 공과 같이, 그것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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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당신은, '공'이 이곳에서 만나게 된 존재자들이 한결같이 어떤 '부재'를 환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포착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요가 휘발된 이곳에서. 그러한 부재감은 더욱 선명하게 감지된다.

이주은의 <Home>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영구불변한 집이란 존재하기 어려우 며 그러한 물리적 집(House)이 이동할 때 심리적 집(Home) 또한 으레 상실되곤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부터 출발하며, 옥정빈의 애브젝트한 조각들은 사회 안에 여성 주체의 자리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존재의 불안이 배양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살만한 삶의 상태가 있다면 살만 한 삶이 부재한 상태가 있다. 김현민의 자살하는 인간과 동물들은 바로 그 '살만하지 않은 삶' 안에서 삶의 의지가 상실된 상태를 스스로 드러내 보인다. 하물며 사람들은 밀실에서 숭고히 자살할 수 있지만, 김현민의 자살한 동물들이 널부러져 있는 테라스는 타인에게 관음의 대상이 되기 쉬운 외부 공간으로, 그들은 죽음을 맞이할 자기만의 방의 부재까지도 겪고 있다.

나아가, 이번 전시에서 모성적 공간을 연상케 하는 도상들을 사용하여 애착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 를 하는 이고은의 <Obsessed>의 내부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어떤 허공이다. 그 허공을 보며 손 을 뻗으면 만져지는 것은 마치 공갈 젖꼭지 같은 텅 빈 돌기들로, 그를 통해 이고은은 우리 모두가 거쳐 온 어떤 것이자 지금-여기의 우리들은 상실한 '코라'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실험실의 연구원이 이종 교 배 실험을 하듯, 이종의 검은 물질들로 외딴 '홀'의 세상에 스스로 자빠지는 검은 인간상을 만드는 박희 민은, 짙게 검어진 인간의 기원을 '짝'의 부재로부터 찾는다. 홀이 짝이 되기를 갈망하는 현상의 기저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욕망을 추동하는 것 또한 어떤 근원적인 상실감이다. 십이지신을 연구하고 있는 김 보경의 <상생-진사> 작업의 중심이 되는 '순환'의 개념에는 시작과 끝이 부재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 요소이며, '죽은 도시'와 '곰팡이 피는 몸'을 통해 무상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이는 채은교의 작업을 통해 가시화되는 것은 영원성의 부재이다.

한편 이용현은 이번 전시의 <고임돌>과 <작은 돌> 작업에서, 조각의 자연적(혹은 전통적) 재료라고 할 수 있는 돌을 인공적 재료인 레진(합성수지)과 결합하여 사용하거나 그것으로 보이게 연출함으로 써 두 물성 간의 관계 혹은 시각적으로 드러난 표면을 통해 물질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 고자 했다. 특히 2층에 놓인 <작은 돌>은, 표면 가공을 통해 언뜻 보기에 가벼운 플라스틱처럼 보이지만 사실 돌이기에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이러한 착각이 유발될 때 물질적 정체성은 교란된다. 그런데 그러한 경계의 허물어짐이 자연스러웠던 세계가 있다. 물질들은 지금 이 세계 안에서 수/금/지/화/ 목/토 등의 각기 다른 존재자로 구분되었지만, 태초에 모든 것이 하나였던 상태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근원에 대한 신화적, 역사적 상실로 인해 오늘날 이 물질과 저 물질은 서로 다른 것이 되었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물질이 다른 물질에 기생해서" 혹은 기대어서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물질'들'에 대한 이용현의 해석과 접근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 내지는 어떤 '하나'로서의 기원을 둘러 싼 모종의 부재감을 읽어내게 된다.

테라포밍, 즉 다른 행성에 지구와 같은 환경을 만드는 공상과학적 상상에 중점을 두고 행성의 자기 장과 대기에 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구현된 김다슬의 '미래구름' 시리즈는, 지속 가능한 미래와 새로 운 공생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진선은 보색 쌍의 색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의 색을 지 퍼와 실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냄으로써, 다양한 개인의 정체성이 서로 연결되고 분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주 보는 보색 쌍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색의 스펙트럼은 다양성의 가치와 공존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립이 팽배한 현 사회에서 느슨한 연대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한다. 김다슬과 김진선은 모두 개인과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접촉, 관계 맺기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작가들이다. 그런 관계가 계속해서 말해져야 한다는 것은 그런 관계가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요를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으로, 필요에 대한 발언은 그것의 부재를 절감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렇듯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시대에 그 기술을 향유할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현재를 비우고 사물들만 남아있다는, 이 전시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배경 설정은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그 발전한 기술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흑인이나 여성의 자리가 그러했으며, 비인간 존재자들이 그렇듯, 소외되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이렇게 여기에 남아 어떤 부재의 감각을 소환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2025년 현재 실제로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존재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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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떤 숨막히는 '없음'의 감각이 이곳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결국 정말 아무것도 없 었을까? 이야기의 진행은 (화자인 '공'을 포함한) 사물들(작품들)이 직접 바라보고 있는 시점 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극 속에서 작품들이 저마다의 자아를 가지고 현현하는 때 우리가 눈 여겨보아야 하는 지점은 그들이 '지금-여기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메타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서있는 '곳과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허공 이 아니다. 이 전시에 함께한 작품들은 대체로 어떤 멜랑콜리와 맞닿아 있으나, 우리는 작품들 이 주고받는 대사 속에서 그러한 멜랑콜리를 타파하는 길을 스스로 제시하는 여러가지 존재 방식들을 보게 된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부재'에 대해 말하는 듯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이면에서 '존재'를 강하게 소환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야기 속에서 이주은의 <Home>은 이곳에 남아있는 까닭에 대해 "오직 나의 몸이 내 집이 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곳을 갈구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힌다. (House와 Home이 일치하지 못해 향수병을 앓게 되거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뉘일 Home을 찾지 못해 떠돌게 되는 등의.) '집의 부재'와 관련한 사회적 세태의 원인을 "자신의 몸 밖에 집이 있다고 믿는 관념에서 찾아 낸 이주은은 집을 잃은 사람 대신 집 자체인 사람이 되기로 한다. 고로 이곳에서 그는 (집이) 없음에 대해 말하는 듯했으나 사실은 이미 모두가 '몸'이라는 단 하나의 집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그 집이 됨으로써 보여준다.

<응시하는 남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옥정빈의 <모르페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 데스 로봇' 속 '무적의 소니' 캐릭터를 모티프로 삼아 구성되었다. 그처럼 극 속에서 옥정빈의 <모르페우스>는 삶 속에서 여성 주체의 안전이 부재함을 느끼는 순간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침을 뱉는 행위를 통해 <빚어진 구토 인간>들로 스스로를 지킨다. 나아가 "한때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하며 시작되는 <마지 막, 소녀>의 이야기는, 노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사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긍정함으로써 주체의 자리에 서고야 마는 강인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옥정빈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혐오의 물결 속에서도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현재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실존의 형태들이다.

김현민의 자살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살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두 번의 씬은, 어쩌면 이 극 속에 서 가장 독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자살은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금단의 것으로, 그것은 1 층 밀실에서 "이곳에는 현실이 없다"라는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곧바로 그러한 부 정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에 없는 것은, 다만 삶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가 김현민의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살만하지 않은 삶'을 '살만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용기이다. 한편 자신이 죽는 이유는 이곳이 '사막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수수께끼 같 은 말을 남기고 자살하는 낙타의 이야기는, 사육사에 의해 어미와 교배한 후 수치심에 자살했다는 낙타 의 실화를 기반으로 재구성된 픽션이다. 이 세계 안에서 동물들이 스스로 자살하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은, 인간에 의해 '살만한 삶'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는 씁쓸하게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뿐이다. 이러한 문제를 작품으로 끌어오는 김현민은 작품에 음식 이름을 이용한 제목을 붙인다. 음식은 삶의 '지속'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지속이 없다면 소유 또한 부질 없어지기 때문에, 죽음을 결심한 존재자들 앞에서 그것은 마치 '제목'처럼, 말 그대로 '이름' 뿐인 것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소유'에 대한 욕망을 다 덜어낸 죽음의 자리에서, 김현민의 '존재'들은 가장 강렬해진다.

모성적 공간에 대한 은유로 만들어진 이고은의 "사람의 살 같은 것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람은 아닌 도상들은 '코라'의 부재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상실한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애착의 대상을 제안한다. 이야기 속에서 이고은의 <Obsessed>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의 욕망을 모방하여 그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스 스로 만들어내는 존재로 등장한다. 타인의 욕망을 미메시스한다는 것은 그러한 욕망을 가진 이를 이해 하는 방법 중 하나로, 그런 의미에서 작가 이고은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의 작업 들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만든 존재'를 환기시키는 존재자들로서, 크고 가벼운 무언가가 작고 단단한 무언가에 기대어 살 수 있는 것처럼, '만드는 존재'가 '만들어진 존재'에 의해 '다시 구성되고 지탱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그려낸다.

자신은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나 말고도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하는 박희민의 홀들은 그 자신의 말처럼 "무언가를 거쳐 온 것으로서 그 안 에 과거의 시간성을 간직하게 되며, 그러한 사실은 박희민의 홀들이 자신들이 붙들려있는 '곳' 을 '허공'으로 감지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러한 '비어있음'에 대한 현재적 인식은 그 자리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던 상태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전제되어야 성립 가능한 것이 기 때문이다. “짝의 시간들"이 그를 "온통 헤집어놓고" 간 자리에서, 그들은 파편들로 쪼개어 져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하나의 몸으로 수렴되지조차 않는 유령 같은 그것'들'의 좌표를 이 세계 안에서 찾고자 한다면, 통일적이고 종합적인 근대 이성 주체 식의 사유를 잠시 제쳐두고, 대상을 '무엇'이 아닌 '어떠한 것'으로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박희민의 홀들은 '무언가'라기보다는 '무언가가 남기고 간 흔적'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삶에 아로새겨진 과거의 상흔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때 즐겨 사용하곤 하는, "짝의 세상들이 우르르 범람해 와도, 그들은 앞서 말한 모난 데들을 끌어안으며 홀로 홀의 세계 안에 풍덩 뛰어든다"라는 표현처럼, 박희민이 만드는 인간상은 '짝'을 이루지 못했거나 이루지 않기로 결심한 자들로, 아물지 않는 상처의 '틈'을 부러 메우려 애쓰지 않고 그대로 두는 법을 아는 존재자들이다. 자신을 난도질해야만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짝'과의 삶 대신, 그의 홀들은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허공과 함께 존재"하며, 때로는 이 홀들 곁에서 또다른 저마다의 홀의 형태로서 작품과 만나는 관객들, 즉 "너와 함께"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상(無常)'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이 덧없음'과 '일정하지 않고 늘 변하는 데가 있음'이라 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두 가지 의미가 분리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유동성'은 '덧없음'과 합치 하는 대신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 '순환'의 자리에 놓일 수도 있다. 채은교의 <녹아내린 살 과 남은 뼈들의 도시>는 "어느 곳이 태어나면 어느 곳은 죽기도 하는 법"임을 보여줌으로써 앞 서 논했던 '영원성의 부재'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한편 이전에도 "수없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 나곤 했다는 점에서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서구식의 직선적 시간관으로부터 이탈하여 시작과 끝이 서로 맞물리는 혹은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순환적 세계로 진입한다. 그곳에서 채은교의 '도시'는, '순환하는 유기체로서 존재한다. 그러한 '순환'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썩어가며 곰팡이 피는 몸'을 다루는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작가가 해당 작품에 붙인, <누군가의배설물속에 서자라난생명체를섭취하여성장한나는또다른생명체의바탕이되고이생명체는또다른누군가를구원할것이니>라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작가는 그러한 부패의 과정을 소멸이 아닌, 다른 존재의 밑거름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생성의 과정으로 보았다. 몸이 죽을 때, "비로소 그 속에서 태어나"는 미생물 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를 통해 새롭게 피어나는 썩어가는 몸은, 삶과 죽음을 대립의 자리에 두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파쇄하며, 언제나 죽음과 함께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존재'의 측면에서 색다르게 조명 한다.

김보경의 <상생-진사>는 바로 앞에 등장했던 채은교의 작업과 '순환'이라는 테제 하에 연속성이 있다. 2024년을 관장했던 용신의 위에 올라섬으로써 그를 흙으로 되돌려보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2025년의 뱀신 또한, "무언가가 돌아오면 무언가가 돌아온다고 할 때, 그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이 라 말하며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에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듯, 이 장면에서 용신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뱀의 해의 도래를 지탱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으며, 이 모습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음이란 삶이 부재한 상태가 아닌, 삶이 다른 방식으로 탈바꿈된 모습일 뿐 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청룡을 딛고 뱀이 머리를 내미는 해, 이천이십오년이라는 지구의 시간은 이 대목에서 암시되는데, 이때 2025년을 관장하는 신인 '뱀'이 사회통념적으로 '용'에 비해 천시되던 동물 이라는 점은, 인간이라는 주류가 사라진 지금-여기에서 비주류였던 비인간 존재자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이 극의 설정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포인트가 된 다.

마지막 씬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기...... 있어요'라는 음성에 뒤를 돌아본 공의 시선에 걸린, “커다란 무언가가 자그마한 무언가에 기대어 있는 형상인 이용현의 <고임돌>은, 커다란 부재, 커다 란 허공이 작고 단단한 존재 방식들에 기대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곳 온수공간의 '여기()있어요' 전 시를 대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온수공간의 앞마당에 놓여 이곳에 발걸음한 관객의 시작과 끝을 함 께 하는 <고임돌>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는 1969년 서교동에 지어진 오래된 주택의 외관과 구조 를 보존하는 증축,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개조된 전시 공간인 이곳 온수공간을 재해석한 조형물이라 볼 수 있다. 이용현에 의하면, '온수공간 내부 곳곳에 커버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오래된 구조물 일부는 그 자체로 긴 시간성과 표면이 아닌 내부의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보존을 위해 리모델링된 새로운 가벽과 구조물들은 과거의 것에 '기생'하여 표면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는 이를 커다란 레진 조각이 작은 돌에 기대어 있는 형상으로 은유하여 나타냈다. 그러나 이용현이 사용하는 돌과 레진 은 작업의 시작점에서 각각 전통과 현대의 것에 대한 유비로 존재하지만, 결국에 둘을 비슷한 표면으로 처리하는 작가의 마무리 작업을 거침으로써 그들의 존재 방식은 '전통에 기생하는 현대'로부터 '전통과 공생하는 현대의 자리로 이행한다. '연마하'거나 '덧씌우'는 이용현의 마지막 표면 처리 작업을 통해 '이것'과 '저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돌과 레진 사이의 선후관계(내지 위계)는 흐려지고,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작은 돌>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극 속에서 이용현의 '작은 돌'이 취하는 "흉내 내기"는 "모든 것이 하나였던 우리의 근원"을 상기시키고, 그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미끄러짐"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의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주인공, '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김다슬과 김진선의 작업 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김진선은 이 뜨개 공을 참여 작가들이 선택한 실을 '보색'의 수세 미 실로 떠서 만들었으며, 참여 작가들이 함께 매듭으로 만들어준 실들을 하나로 모아 커다란 공의 형상으로 재탄생시킨 <엮는 조각>과 함께 배치된 <열고 닫는 조각 2> 또한, '보색 쌍'의 지퍼들이 연달아 이어지는 구조로 제작되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보색'이라는 개념이 '쌍' 을 이룬다는 지점에 주목했다. '쌍'은 함께'의 개념을 소환한다. 이러한 '함께 하기'의 철학자 로 대표되는 도나 해러웨이를 깊게 공부한 김다슬과 김진선의 이상향에는, 인간 중심적 사고 를 벗어난 지점이 있다는 점에서 접점이 존재한다. 이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지금의 인류세와는 달리, 비인간 존재자들과도 '함께 하는' 세계이다. 김다슬이 구현한 '테라 폴리스'와 '미래 구 름' 행성들은 불가분의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함께 만드 는 열린 공간'이다. 이러한 김다슬의 작업 세계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극의 열한 번째 씬에서, "이 모든 트러블들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해러웨이의 인용으로 표현되었다.

해러웨이가 저서 <트러블과 함께 하기>에서 제안하는 것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친척들'인 이 세계 속 모든 존재자들과 함께 하는 '실뜨기 놀이'이다. 이종과 친척이 된다는 것은 해러웨 이에 의하면 "트러블로 진입"하는 일로, 김진선의 '실뜨기'는 해러웨이가 논했듯, 바로 그러한 '문제가 되는' 관계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존재하는 방식을 모색하려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이야기 안에서 단수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전시장 안에서 복수의 형태로 존재하는 김진선의 '공'은 새로운 존재자를 만날 때마다 그 색이 변화하는데, 이는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과정 속에서 다른 가능성으로 분화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극에서 공이 스스로 이야기하듯,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그 어떤 인간도 남아있지 않은 시공간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한 이곳에서, 김다슬의 '테라폴리스의 하늘'에서 온 김진선의 '공'은 비단 인간의 부재뿐만 아니라, 무수한 부재들과 마주친다. 그러나 텅 빈 거실 구석에 주저앉아 끝없는 없음의 공허에 구역감을 느끼는 대신, 공은 멈 추지 않고 부드럽게 구르며 나아간다. 그렇게 공은 '울타리들' 너머의 모든 것을 만나고, 그 접촉으로 인해 다른 색으로 변모된다. 이 '공'이라는 존재자에 대해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접촉'이라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의 '접촉'은 상대에 대한 미메시스를 요한다. 접촉 속에서 차이는 고 정불변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 이야기의 화자를 '공'으로 이름 붙인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이는 실제 전시장에 놓인 뜨개 공 의 형태와 같이 영어에서 ball로 번역되는 구형의 공이기도, 이 전시의 테마인 부재'로서의 공(또)이 기도, 무엇보다도 애써서 들이는 정성과 힘이라는 뜻의 공()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존재자를 이해하 기 위해 더듬더듬 다가가며 들여야만 하는 공() 말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극적이지 않다. 궁극적으로 크게 바뀌거나 해결된 어떤 사건 같은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필자는 이야기는 해결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공이 이곳에서 만난 모든 것, 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들인 공()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 그것을 보아주었으면 했다.


4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 청록빛이었던 공은, 이곳을 나올 때 붉은빛에 물들어있다. 그런데 이는 없 었던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 김다슬의 <테라폴리스의 하늘> 앞에 놓인 청록빛 공을 다시 들 여다보면, 그것이 안에 보색 쌍의 붉은색을 이미 품고 있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통해 환기되는 것이 우리 안에 부재한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듯, 필자가 작품들을 엮으며 깨닫게 된 하나의 진리는 모든 부재는 결국 끝에서 존재에 가닿는다는 것이다.

고로, (전시를 꼼꼼히 본 독자라면 진작에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있어요"라는 대사로 맺어지는 이 기나긴 이야기의 끝에서 '공'이 깨닫게 된 것은 결국 이곳에 어떤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들)과 이곳에 함께 있기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전시장에서 부재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곳에서 부재라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무언가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이름은 '여기 () 있어요'이다. '여기 ( ) 있어요'라는 전시명의 빈칸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고 했을 때에도, 그 공백, 그 부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지금쯤, 글의 초입에 등장했던, "텅 빔과 동시에 가득 차 있는 신묘한 세계"라는 모순적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부재라는 이 전시의 테마는 결국엔 존재를 환기시킨다. 광막한 부재 속에서도 우리는 이제까지도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존재 방식들을 이곳에서 건져 올린다. 그것들과 우리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이곳에 모인 열 명의 작가들은 자신 안에, 혹은 이 세계 안에 무언가가 없음을 자각하고 있 다. 그 없음에 의해 작업이 추동되었든, 우연히 작업을 통해 그러한 없음의 감각을 소환하게 되었든,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들의 작품은 이미 현재 안에서 그 '없음'의 정체를 추적하며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곳의 작품들은 이미 도래했었거나 언젠가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과거나 미래의 '유토피아'로 떠나는 대신, 지금-여기에 남아 오늘을 산다.

그처럼, 삶의 모든 국면에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이 구조의 안에서 억압에 짓눌리는 우리가, 비록 몽상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안에서 그저 끊임없이 질서의 바깥을 상상하는 예술가로서 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분명 갑갑한 이 삶에 숨구멍으로 작용할 어떤 거리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가 아닐 수도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여기 () 있어요'라는 이 전시 의 제목에서, 괄호 안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신이 자유롭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나, 우리, 사람, 예술작품, '지금' 등, 다양한 것이 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없음을 거쳐 있게 된 것들에 대해, 없음과 함께 있는 것들에 대해, 있지만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없기 때문에 있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괄호 안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으면 전시의 테마인 부재'를 환기하기도, 빈칸 을 공(空)으로 간주하고 아예 괄호 자체를 소거해버리면 이 극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한 '여기 있어요' , 즉, 이곳에 함께 있어달라는 부드러운 요청도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존재가 이곳에 있었고, 이곳에 있으며, 이곳에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과거나 미래로 떠나버린 세계에 서도, 현재성은 그렇게 구제된다.

그래서, 지구의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까?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_주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