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밤
Night and Night
현다혜
2024.11.20 ― 2024.12.8
장소 | 온수공간 1 - 3F
관람시간 | 12 - 7PM
주최·주관|현다혜
글|황지원
디자인|이건정
도움|박금비 주용성
후원|서울특별시·서울문화재단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본 사업은 2024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입니다.
장소 | 온수공간 1 - 3F
관람시간 | 12 - 7PM
주최·주관|현다혜
글|황지원
디자인|이건정
도움|박금비 주용성
후원|서울특별시·서울문화재단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본 사업은 2024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입니다.
밤과 어둠
황지원
밤과 어둠의 차이를 우리는 정원의 어느 구석에서 알아챘는가. 밤의 정원. 저녁의 정원에도 정혜, 은혜, 미혜 같은 명찰이 붙여진 나무들의 잎사귀,그림자, 잎사귀, 그림자를 드리우나. 정원의 여자들은 어디로 다 흩어졌나.한 사람3, 김행숙
코끝을 매는 냄새를 숨기기 위해 씌우는 덮개처럼 나는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모든 것을 어둠 속에 꼭꼭 숨긴다. 굳이 볼 필요 없지. 사는 데도 불구하고 볼 수 없는 시간대란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샛노란 여명은 계속해서 드리운다. 어딘지 모를, 여정을 떠나는 것만 같은 그녀들이 찍혀있다.
죽은 표정(deadpan)이 아니라, 정동에 휩싸인 표정은 그녀들이 자고 있을 때 상영되는 풍경과 대조된다. 우리에게 무관심은 필요 없어. 나는 사진 안으로 들어가 비로소 감흥에 휩싸일 것이다.
사진이라는 박제된 모호함은 마치 기호를 와해시키려는 듯이, 규정된 유한함에서 벗어나 이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사이 어딘가에 혼재된 레이어로 나타난다. 그것은 실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재가 아니다. 형용할 수 없이 왜곡되고 상상된 그 무엇이다. 날 때부터 오로지 사적인 삶으로만 결부되었기에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그녀의 노동은 그녀의 삶 일부를 환영으로 만들었으니까.
전율을 느낄 만큼 음흉한 사진은 그것을 담지 못한다. 사실, 사진은 ‘다움’이었다. ‘-답다’할 때의 다움. 사진답다. 거꾸로 맺힌 어두운 방에서 이제는 더 이상 충실함은 중요치 않다. 한 장의 사진이 곧바로 서지 않고, 여섯 개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시야로 스며들 때, 비로소 현기증이 발현되지 않는가? 불확실한 감각을 망막으로 흡수하고 눈을 감아도 새어 나오는 빛처럼 불완전하고 신뢰할 수 없는 불투명하고 늘어지는 실존의 감각이 그것이다.
활동적인 낮이 통제되는 중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식적인 어둠’으로부터 ‘부수적인 어둠’을 구별하도록 하자. 유발된 어둠, 곧 낮에 반대하여 일으켜진 어둠, 제한적인 동시에 무한한 행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어둠을.
알랭 바디우, 검은색, p. 14
*
현다혜(Hyun Dahye)는 파편처럼 깔린 형체 없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다.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장면들을 그럼에도 볼 수 있다 믿으며 사진으로 따라간다.《끈적이는 바닥Ⅲ : 그때, 그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공간 힘, 부산, 2024), 제9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영-아티스트 사진전《여전히 밝고, 아직은 어두운》(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 2023), 세월호 6주기 추념전《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는지》(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20) 등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밤과 어둠
황지원
밤과 어둠의 차이를 우리는 정원의 어느 구석에서 알아챘는가.
밤의 정원. 저녁의 정원에도 정혜, 은혜, 미혜 같은 명찰이 붙여진 나무들의 잎사귀,
그림자, 잎사귀, 그림자를 드리우나. 정원의 여자들은 어디로 다 흩어졌나.
한 사람3, 김행숙
코끝을 매는 냄새를 숨기기 위해 씌우는 덮개처럼 나는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모든 것을 어둠 속에 꼭꼭 숨긴다. 굳이 볼 필요 없지. 사는 데도 불구하고 볼 수 없는 시간대란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샛노란 여명은 계속해서 드리운다. 어딘지 모를, 여정을 떠나는 것만 같은 그녀들이 찍혀있다.
죽은 표정(deadpan)이 아니라, 정동에 휩싸인 표정은 그녀들이 자고 있을 때 상영되는 풍경과 대조된다. 우리에게 무관심은 필요 없어. 나는 사진 안으로 들어가 비로소 감흥에 휩싸일 것이다.
사진이라는 박제된 모호함은 마치 기호를 와해시키려는 듯이, 규정된 유한함에서 벗어나 이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사이 어딘가에 혼재된 레이어로 나타난다. 그것은 실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재가 아니다. 형용할 수 없이 왜곡되고 상상된 그 무엇이다. 날 때부터 오로지 사적인 삶으로만 결부되었기에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그녀의 노동은 그녀의 삶 일부를 환영으로 만들었으니까.
전율을 느낄 만큼 음흉한 사진은 그것을 담지 못한다. 사실, 사진은 ‘다움’이었다. ‘-답다’할 때의 다움. 사진답다. 거꾸로 맺힌 어두운 방에서 이제는 더 이상 충실함은 중요치 않다. 한 장의 사진이 곧바로 서지 않고, 여섯 개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시야로 스며들 때, 비로소 현기증이 발현되지 않는가? 불확실한 감각을 망막으로 흡수하고 눈을 감아도 새어 나오는 빛처럼 불완전하고 신뢰할 수 없는 불투명하고 늘어지는 실존의 감각이 그것이다.
활동적인 낮이 통제되는 중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식적인 어둠’으로부터 ‘부수적인 어둠’을 구별하도록 하자. 유발된 어둠, 곧 낮에 반대하여 일으켜진 어둠, 제한적인 동시에 무한한 행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어둠을.
알랭 바디우, 검은색,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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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다혜(Hyun Dahye)는 파편처럼 깔린 형체 없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다.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장면들을 그럼에도 볼 수 있다 믿으며 사진으로 따라간다.《끈적이는 바닥Ⅲ : 그때, 그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공간 힘, 부산, 2024), 제9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영-아티스트 사진전《여전히 밝고, 아직은 어두운》(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 2023), 세월호 6주기 추념전《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는지》(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20) 등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