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


고우리


2024. 10. 2 - 2024. 10. 27



장소 | 온수공간 1F
관람시간 | 12 - 7PM, 월요일 휴관

글| 안소연 @letternpaper
사진 | 배한솔 @studio.stack
포스터디자인 | 마르시안스토리 @martianstory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별도의 오프닝 행사 없이 작가가 전시장에 있을 예정입니다.













나와 너, 사이의 거리


고우리 개인전: 흐릿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


2024.10.02-10.27 온수공간


안소연

미술비평가


* 말과 몸짓, 단어 혹은 언어, 흐릿함과 희미함, 사이와 연결, 쓰다듬음과 건념, 흘러감과 방황, 무 제와 복기, 일련의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글자들이 서로 중첩되고 교차하면서 어떤 정황을 만든다.

분리되어 있으나 좁은 통로와 벽으로 연결된 공간을 하나의 지지체 삼아, 모호한 의미들이 간혹 선 명하게 직조되는 것 같다가도 암흑 같은 미궁으로 흩어져 버리기도 한다. 감추어져 있는 말들의 흔 적처럼, 어떤 몸짓이 남겨 놓은 물질과 형상들이 번갈아 빈 벽을 메운다. 메워진 벽은, 더욱 미궁 같 다. 그리기와 지우기, 붙이기와 자르기, 심지어 안쪽과 바깥쪽처럼 서로 반대편에 있어야 할 말과 행 위의 의미들이 서슴없이 공존해 있다. 고우리의 개인전 《흐릿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2024)은 그러한 역설을 보여준다.


* 고우리의 회화는 요란한 내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 서로 복잡하게 엉켜 있고 심각하게 훼손된 채 잘려나간 흔적이 그대로다. 그러한 정황들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면서도, 정작 제 표정을 감추고 있는 상처 난 얼굴처럼 처연한 순간 속에 멈춰 선 육체의 부동성마저 보여준다. "흐릿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이라는 문장에서, 과연 이 역설적인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를 생각해 본다.

절단된 캔버스 조각들과 흐릿하게 채도가 사라진 표면의 질감들 앞에 대면하고 서 있던 작가 자신인 가, 아니면 훼손된 육체로서 저 결핍과 복구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회화와 회화 사이의 관계를 맴 돌고 있는 유령 같은 존재들인가?

그의 회화는 어쩌면 주체가 불확실한 "나"와 "너"라는 2인칭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흔적들처럼 보인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현실의 불안과 갈등으로부터 회화적 관계의 단서를 구축해 온 고우리는, 내가 그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에게 그림은 일종의 친 구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무엇이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림과 그림 사이를 수 없이 왕복하며 "모체(원형)에 대한 "기억(복기)"이라는 벌어진 틈 사이의 위상을 살폈다. 그와 회화 사이의 2인칭 관계는, 회화와 회화 사이의 모체에 대한 기억의 관계로 변환되어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쉼 없이 조율하는 수행적 행위를 낳는다.


* <흐릿한 언어, 연결된 몸짓 (2024), <흐릿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2024), <방황하는 바람 사 이에>(2024)로 벽을 타고 흘러가듯 연결되는 전시장의 동선은, 개별적인 제목들의 흐릿한 연결과 파 편적인 말들 간의 결합처럼, 어떤 행위와 결합된 물질의 흔적들이 그 둘 사이의 경계면을 파열시키 기도 접합하기도 하는 기이한 긴장을 보여준다. <흐릿함을 쓰다듬으며 건네는 말>은 조각난 캔버스 를 이어 붙여 그 위에 채도가 거의 없는 무채색 계열의 물질-핸디코트와 몰딩페이스트-을 손으로 이겨 바르듯 펼쳐 놓은 모양새가, "나"와 "너"라는 (특정할 수 없는) 둘 사이의 주고받은 (회화적) 행 위에 대해 상상해볼 여지를 준다. 물감이 아닌 표면을 덮을 만한 물질로, 그는 투명도와 유연한 움 직임을 이리저리 매만졌을 테다. 저 불완전한 캔버스와 그것을 향한 신체의 행위는, "작용"과 "반작 용"의 물리적 관계로 인한 흔적들"을 회화로 호명할 조건을 바쁘게 찾는다.


고우리는 캔버스를 해체함으로써, 그리고 물감의 채도 대신 은색 물질의 투명한 반짝거림으로, (회화적) 실체와 (회화적) 환영을 둘다 만족시키는 회화 표면의 질감을 구축하여 행위"와 "촉각"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조성해 놓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신체 행위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육체로 서의 캔버스를 의인화 하여 행위의 주체자로 자신과 대면시킨다. 그리하여 "나"와 "너"라는 2인칭의 관계 안에서, 둘의 행위가 서로를 쓰다듬듯 결합하는 방식과 일종의 경계면으로서 회화 표면 앞뒤의 위상을 수평적으로 (재)위치 짓곤 한다. 마치 정면성을 추구하는 회화의 (관습적인) 평면이기 보다는 의인화 된 신체로서 또 다른 신체와 대면하게 되는 촉각적 "피부"를 환기시킨다. 제목에서 특정하는"흐릿함"이란, 가시적인 흐릿함이 강력하게 이끌어내는 촉각적 대응이라는 역설적 감각의 변이 속에 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시사한다. 망막의 한계를 넘어선 손의 수행적 행위는 촉각적 회화의 가능 성, 즉 행위의 흔적으로서의 그림이라는 능동적인 피부를 탄생시켰다.

회화 표면에 대한 탐구는 그의 오래된 관심사다. 그는 캔버스 자체와 임의의 행위를 주고 받아 얻게 되는 우연과 예측의 양가적인 회화 표면을 수용한다. 그것을 제스처 페인팅의 추상적인 흔적이 라고 하기에 작가의 행위 못지 않게 캔버스의 수행적인 작용/반작용 또한 크게 개입시킨다. 캔버스 를 둘둘 말아 비틀기도 하고, 캔버스 내부의 평면을 다수의 조각으로 절단해 그 잘려나간 가장자리 에서 올이 풀려버린 사고를 방치한다. 되레 그 상처 난 피부의 균열에 다가가 더 이상 손 쓸 수 없 는 요철을 얼룩처럼 남겨 놓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캔버스의 해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조되어 있어서, 접혔다가 펼쳐지고, 잘렸 다가 다시 붙여놓은, 수동과 능동의 위상을 오가며 주고받은 이 행위의 흔적들이 표면에 역력하다. < 흐릿한 언어, 연결된 몸짓>을 보면, 회화의 가장자리는 강한 접힘의 자국과 펼침의 노력이 과거와 현재의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힘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게다가 여러 캔버스 천의 색과 두께와 모 양과 강도를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 이어 붙여 개별적인 파편들 사이의 불합리한 조건마저 적나라 하게 드러내 보인다. 애초에 이 회화의 표면은 그 위에 무엇을 그리기 위해 팽팽하게 펼쳐놓은 평면 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부정하듯, 모난 속살을 여지 없이 밖으로 배출해 놓은 것 마냥 솔직해 보이기 까지 하다. 이에, 길들여 지지 않은 모난 표면과 대면한 그는, 하얗고 평평한 자리들을 지나 얼룩덜 룩하고 이질적인 모서리들이 뒤엉켜 연결된 경계에 다가가 자신의 촉각을 덧입힐 또 다른 행위를 보 탠다. 이렇게 캔버스의 신체와 고우리의 몸은 둘 사이의 연결된 "몸짓"이라는 (우연적이면서 필연적 인) 수행성으로 매개된다.


* 전시 공간의 더 깊숙한 내부로 들어가면, 마치 회화 표면의 역설적인 결합처럼 회화와 회화 사이 의 닮음과 다름을 오가는 미묘한 시차(i/Bt)가 엿보인다. 그가 모체"로서 특정하는 회화가 여 기에 자리한다.

한쪽 벽을 타고 길게 늘어져 있는 <무제-연결된 말 (2024)은, 끝없이 이어 붙인 캔버스의 표면이 천장과 맞닿은 벽의 모서리로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채 (실패한) 기념비적인 신체를 표상하듯 제 존재의 침묵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저 피부의 상흔 외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회화는 단지 봉합"된 행위의 흔적들만이 길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제목 없음"과 "연결된 말"이 환기시키는 회화의 이미지는, 단지 (무의미한) 부재"의 지속적인 연결처럼 의미 바깥에 던져 진 부재의 현시를 나타낸다. 그는 이 역설적인 표면에 (불가능한) 원형으로서 모체"의 정체성을 부 여한다.

그 모체의 피부가 가진 내부하고 말해도 될까? 길게 늘어진 <무제-연결된 말>을 지탱해 주고 있 는 벽 뒤편, 그러니까 이 회화의 신체 내부의 위치 정도로 파악되는 벽의 반대편에는 모체 회화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는 <연결된 말-복기1, 2>(2024)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그렇다면 둘은 하나의 육 체에서 탄생한, 같은 유전 형질을 지닌 관계인가. 크기도 모양도 다른 두 개의 복기된 이미지들은, 바로 직전에 지나쳐 온 <무제-연결된 말>의 부분을 기억하며 고우리가 자신의 신체로 모방하여 기 록한 파편들이다. 모체와의 닮음과 다름을 공유하며, 동시에 복기된 이미지들 간의 단절과 연결을 기이하게 함축하면서, 여기에 행위자로서 고우리의 몸이 기억하는 앞선 행위에 대한 반복을 보여주 는 이 시간과 공간의 복합적인 관계는, 그의 회화 표면에 역력히 드러나 있는 "흐릿함"의 실체를 규 명해 준다.

<무제-희미한 단어>(2024)가 놓인 공간에 이르면, 고우리는 모체가 되는 회화의 오른편에 복기된 회화 연작 세 점을 나란히 두고 이 셋 안에 이접되어 있는 상이한 시공간의 맥락들을 되짚는다. <무 제-희미한 단어> 표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질적인 행위의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그것이 시각적 작용 을 배반하며 촉각적 반작용으로 또 다시 표면을 위태롭게 만드는 둘 사이의 우연과 필연, 도무지 모 방도 재현도 어려운 저 모체의 원형을, 고우리는 또 다시 조각내기를 감수하며 신체의 "부분-대상들" 처럼 어떤 원형에 대한 (부재의) 기억을 간직한 파편들을 모으고 있다.


* 어쩌면 한 사람의 주체로서, 혹은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그가 겪어낸 고립과 불안은, 캔버스를 의인화 된 신체로 불러내 그것과 주고 받은 말과 행위로 어떤 흐릿함과 대면해 보려는 작가의 속내 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반듯한 캔버스의 프레임을 굳이 접었다가 다시 펼치는, 그 쓸모 없어 보이는 행위의 지난한 반복을 통해, 구멍 뚫고 잘라내는 행위를 금세 번복하듯 다시 메우고 붙이는 행위로 돌이키는 그 모순을 통해, 그는 제 스스로 원형의 평면을 상실한 회화의 흐릿해진 표면에 다가가, 그것의 존재 방식으로 회화적 당위를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