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입자, 열매가 된 사람




2022. 11. 19 - 2022. 12. 10


김정화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 F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대화, 글ㅣ변경주
디자인ㅣ디자인스튜디오 이음 @DESIGNSTUDIO_IEUM
설치ㅣ브리코프 @BRICOF_KJH
후원 | 서울문화재단, 서울특별시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계가 정한 시간으로, 시선으로 잘린, 보이지 않는 나이 듦(age)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영어 단어 age는 명사로 노인, 나이 든 사람을 의미하지만, 다른 단어의 뒤에 붙어 -age가 되면, -한 상태를 의미한다. 고착된 이미지가 아닌, 결정(Crystal)이 된 이미지로, 단절된 서로의 시간 사이를 관계 맺고 흐르고 넘어가 보려 한다. 엄마의 어린 시절 할머니의 기억은 불완전하지만, 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서로 기억하고, 말하고, 들으며 수직의 시간이 아닌, 고리로 연결된 수평의 시간으로 관계를 맺는 나이를 생각해 본다. 사진을 찍는 일을 이미지가 맺히는 과정에 은유하여, 엄마의 이야기 속 단서가 되는 장면, 흔적, 그림자를 사진에 담는다. 사진에서 명도를 표현하는(회색) 공간과 단계를 관계적으로 바라보고, 상의 재현보다 흑색 입자의 몰림과 퍼짐의 정도로, 보이는 이미지가 아닌 사이로 흐르는 이미지를 표현하려 한다. 

글 김정화







어둠 상자

어느 날 내게 ‘나이듦’이 들어있다는 묵직한 상자 하나가 안겼다. 상자 안에는 시간의 직선적 방향을 벗어난 어떤 상태의 나이듦이 들어있는데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면 꺼낼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도 함께 전달되었다. 상자에 귀를 대보고 흔들어 본다. 냄새도 맡아보고 살짝 혀도 대어본다. 그제야 봉인된 상자를 쉽게 열 수 없음을알고 적잖이 당황한다.

상자 겉면에 ‘소리. 입자. 열매. 사람’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호문쿨루스(Homunculus)를 떠올려본다. 중세 연금술사들이 만들어낸 이 피조물은 물질을 증류하여 혼합하고 숙성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들어낸 미니어처 인조인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리 플라스크 안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괴테의 <파우스트> 2부 2막에 등장하는 호문쿨루스는 뛰어난 지능과 통찰력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지만 정작 자신이 머물 육체는 가지고 있지 않다. 물질의 상태로도 완벽한 인간이었던 호문쿨루스는 육체 없는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생각하고 몸을 가진 진짜 사람을 갈망하다가 플라스크를 깨고 나가 결국 소멸되고 만다. 다시 상자의 희미한 글자들을 읽어본다. ‘소리. 입자. 열매. 사람’.이들은 어떤 관계로 연결된 것일까……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상자와 함께 전달되었던 쪽지를 다시 펼쳐본다. ‘시간의 직선적 방향을 벗어난 어떤 상태의 나이듦’이란 글자들을 찬찬히 읽다가 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를 떠올린다. 싱싱한 열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색은 탁해지고 표면은 쭈글거리며 향은 변질된다. 내부의 수분이 날아가면서 질량은 줄어들고 단단했던 과육은 퍽퍽해진다. 선명했던 사과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고 불분명해지며 안에 있던 무언가는 끊임없이 소실된다. 시간의 직선적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이듦이란 자신을 채우던 것들이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현상이라고 짐짓 결론지어본다. 곧 ‘현상’이란 단어에 주춤한다. 얼마 전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극을 두고 용산구청장인 어느 여자는 핼러윈 행사는 축제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정확히 짚어주었다. ‘현상’이라는 건조한 단어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납작해지고 어두워지며 멈춰선다. 어서 현상으로서의 나이듦을 벗어나야 한다.

어둠을 뚫고 올라와 표면에 맺히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빛을 통해 거꾸로 상을 맺히게 하고 어둠에 잠겨있던 색과 형태를 끌어올린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빛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기억을 결합해 하나의 사건을 만들며 시간적 연속성을 정지시킨다. 낡아 가고 희미해져 가며 죽어가는 어떤 상태들은 빛의 입자들과 공명하여 이미 와 있는 다른 현재와 연결된다. 과거를 현재에 들러붙게 하고 미래를 과거보다 더 멀리 갖다 놓기도 하는 이 낯선 접속은 원인을 결과에 종속시키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정말 이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상자를 안고 있는 팔의 감각에 집중해 본다. 미세한 움직임들과 약간의 온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상자를 열 방법을 찾지 못할 것 같다. 늘 그래왔듯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은 다시 그림자의 영역으로 되돌아간다. 다만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머무는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으로, 소리로, 어떤 맺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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