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의 작은 점을 스와이프


SWIPING THE LITTLE DOT UNDER YOUR EYES.



2022. 10. 27 - 2022. 11. 16


박지인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 F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글 | 강정은, 송재준
번역 | 이윤서  
디자인 | THREE LEGGED DOG 
촬영 | 고정균
도움 | 노윤선, 정동욱 
후원 | 서울문화재단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본 전시는 <서울문화재단 2022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눈가의 작은 점을 스와이프


나는 핸드폰에 저장된 누군가의 사진을 보고 있었고, 그가 문득 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보고싶다’는 언제부터 그리움을 담아내는 단어였을까. 그 단어가 지금 내가 가진 그리움을 충분히 담아주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선명하고 말끔하게, 왼손에 쥐어진 네모 화면을 통해서 움직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손가락을 벌려 줌-인을 해본다. 예전에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눈가의 작은 점을 발견했지만 나는 여전히 보고 싶었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계속 내 옆으로 당겨오려고 하는 마음은 멈춰지지 않는다. 가만히 그 점을 만져보았다.

나는 이런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정확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헤어진 연인의 SNS을 통해 울다가 웃고 또다시 울고 화를 내고 있었다. 2015년 7월 여름 한 달 동안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들에 키득거리며 구경하다가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나의 과거 연인의 SNS에 방문해 보았다. 수많은 장소가 있었고 그곳들은 함께 가 본 장소와 가보지 못한 장소로 나뉘었다. 함께 가보지 못한 장소는 우리의 절단된 관계를 확인시켜 주었고, 잊고 있던 그와 나의 간극이 갑자기 아주 많이 선명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점을 만져보던 마음으로 그 장소에 가본다면 간극을 좁힐 수 있지 모른다.

그와 나 사이가 좁혀진 간극의 증거로 삼기 위해 내가 촬영한 첫 사진은 덕수궁에서 바라본 저물고 있는 해의 사진이었다. 난 반드시 그가 찍은 사진과 동일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렇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해시태그가 없거나 장소의 특정적인 부분의 추정이 불가능해서 내가 찾을 수 없고 갈 수 없는 곳들이 늘어갔다. 단서의 끝자락이 부족한 내게 추적을 지속하게 해주는 방법들은 구글맵, 로드뷰, 웹서핑 등이다. 덕수궁을 헤매듯 나는 가만히 앉아 많은 곳을 헤매었다. 이 방법들은 2019년 베니스에서 했던 추적처럼 고정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비슷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게 했지만, 결국 닮은 것을 반복해서 찾아낼 뿐 같은 것은 아니다. 예정된 실패의 반복이 가져오는 것은 유실되기 전에 있던 어떤 것의 윤곽선과 덩어리감일뿐 어쩌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빠르게 달라진 생활의 부분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어떤 것을 삭제하고 모든 것을 끌어올 수도 있지만 강한 즐거움과 공허함이 동시에 따라붙는다. 이렇게 갈수록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세상의 많은 부분들 속에서 물리적으로 찾아가고 어떻게든 내게로 가져오고자 하는 희구는 나의 작업들을 구성하는 골자가 된다.

나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어떤 모양으로 뜯긴 건지 알 수 없는 곳에 동그랗거나 혹은 네모난 것들을 끼워 넣어보기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다. 뜯긴 뒤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면서 그게 본래 무슨 모양이었는지 유추해가는 것 같다. 유실된 것들을 그저 어딘가에 툭 묻어버리거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흘려 보내는 게 멋진 거라고 여기는 현재에서, 이미 없어져 버린 것에 대한 나의 확실한 인지의 과정은 좀 질척거리고 실속 없다. 본래의 모양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게 무슨 형태였는지 알 수 없게 꿰매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나는 뜯긴 그 모양을 잊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작가 스테이트먼트 l 박지인




Swiping the Little Dot Under Your Eyes I was looking at someone’s picture saved in my phone, and thought I wanted to see him all of a sudden. Since when did ‘the want to see’ somebody, embrace the longing for that person? Still I am not so sure whether the word deliver enough the fact that I do miss him very much. I keep on wanting to see him, his face which moves oh so clearly inside the rectangular screen held by my left hand. I try to blow-up the image using two fingers. I discover the little mole at the corner of his eyes that I once found beautiful and keeps on being beautiful now as well; I still want to see him. He is right in my grip yet he should be closer. Without a word I caress the little dot on the screen.

I am not the only one to feel this kind of urge. Random people with random nicknames spy on their ex’s social media account only to cry and laugh, then wail some more before ending up real mad. Yet at first those emotions were seemingly irrelevant to me, and July 2015 started off as a summer full of snickers. Not long after I began to wonder what that really felt like, and took a glimpse of my own ex’s account. There I stumbled upon so many places, some we had been together and others not. The latters confirmed our current rupture, and made me realize that it was really over between us. A whiff of a thought as follows; if I traveled to the unshared places with the same attitude I caressed the dot on the screen, perhaps I would be able to close the distance between us.

The first picture I took as a proof of our newly narrowed-down distance was a sunset at Deoksugung. I was absolutely sure I could take the exact same picture as his. However I could not. Either there were not enough hash tags or other information, thus the GPS could not track the exact same location. The number of places out of my reach kept on doubling. I was always out of evidence but I held on to Google map, road views and researches on the Internet. Like I did at Deoksugung I sat still and wandered around various sites only using my eyes. It was not the first time as I went through a process analogous with this chase in Venice, 2019: it helped me find similar things, but that was it. Similar is never a word for same. The repetition of a predestinated failure can bring back the rough outline and lumpy mass of a lost thing. Yet maybe I do not know exactly what I lost. The difference in our schedules has quickly erased some things. Even though it is now so easy to bring everything back using all means, it is nevertheless subject to deep pleasure and emptiness at the same time. Although our world is becoming more and more difficult to grasp, I aspire to find and bring back physical evidence of a lost fragment.This gap has become an essential root to my works.

While repeating failures, I keep on trying to insert a round or rectangular shape to a place where nobody knows what shape it was torn. I would try guessing the original shape it had before being torn out. Nowadays we tend to coolly dismiss all lost causes so my attempt at clearly recognizing those things may appear a little muddy or hollow. Of course, it is possible to sew the torn thing back regardless of its original state; however I probably do not want to forget how it was torn and left like.

Statement ㅣJii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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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를 메우는 그만치의 빈자리


글 | 강정은



그와 나는 14 년에 만나 19 년까지 동거했다. 내가 유학길에 오르면서 우리 관계는 유착된 것이 억지로 찢길 때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가장 지척의 것이 하룻밤 새 만 리 너머로 달아갔구나. 20 년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고 우리는 얼굴 한 번 마주 보지 못한 채 6 년이란 세월을 마감했다. 그 이후 뻔뻔스레 살아갔지만 언젠가는 미뤄둔 빚 을 청산해야 하듯, 22 년 초 나는 아주 무너졌다. 이 글을 쓰는 10 월로부터 몇 주 전 그에게서 새 가족을 꾸릴 거란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때 서둘러 가능한 모든 감정을 호출했는데, 걔 중 가장 즉각적인 건 기쁨이었고, 그 사실로 부터 다시금 기쁨을 느꼈다. 나는 새 소식을 축하했고, 그와 잠시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으며, 이후 산책하면서 아주 울었다.

그 수다에서 그와 내가 동시에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남긴 부재의 구멍을 어떻게 해서도 채울 수가 없더라는 것. 그와 나 각자 앞으로 서로가 아닌 다른 연인을 만나겠지만 그들을 통해서 이 구멍을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구멍의 역할은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빈 것을 빈 것으로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을, 서로의 마음에 바람길을 낸 사람들끼리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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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런 이야기를 가진 내가 박지인의 개인전 <눈가의 작은 점을 스와이프>에서 발견한 몇 가지 의미들을 해제한다. 나에게 그의 작업은 자신에게 남겨진 누군가의 부재를 그것을 채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가만히 바라보는 쓰디쓴 일련의 시도들로 읽힌다. 그는 사진으로만 남은 그리운 대상을 연거푸 복사하고(「반복 복사」), 옛 연인이 올린 SNS 속 장소를 뒤쫓으며 다시금 그의 빈자리를 확정하며(「'S'가 없는」,「내가 추적하고 있는 사진」), 우 두커니 서서 그 아무도 아닌 사람들을 줌인 zoom-in 하여 누구를 추적하는지도 모른 채 자꾸만 누군가를 앵글에서 놓 친다(「베니스에서의 추적」). 부재를 감당해 내는 그의 구체적인 방법은 시각 의존적이고 반복적이며, 종국엔 되려 부 재를 강화하는 실패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들이 내게 건넨 질문은 다음과 같다: 작가는 왜 자꾸만 부재를 소생시키는가.

만질 수 없는 대상과 접촉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은 검은 액정을 깨워 그 아래 고여있는 사진들을 뒤적이는 것이다. 「반복 복사」 는 그리운 대상을 애꿎은 종이 더미로 치환시킨 작가의 빗나간 노력이 다. 기억을 붙잡듯 거듭 복사된 이미지 속에서 너는 점점 더 형체를 잃고, 너를(종이 더미를) 쓰다듬을수록 너는 계속 해 달아난다. 결과적으로 전시장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반복 복사」의 첫 얼굴은 아무런 자취도 남지 않은 육면체 공산품의 흰 덩어리다.

더는 물리적일 수 없는 관계를 복원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나아가 작가는 관계의 부재를 시공간에서 직접 나서 경험한다.「'S'가 없는」은 전 연인이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린 사진을 참고하여 작가가 스스로 동일한 사진을 찍어보는 작업이다. 6 년 동안이나 세계 각지를 떠돌며 모방을 목표로 삼는 동안, 작가는 최대한 같은 사진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인의 사진과 자신의 것을 비교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계정을 액정 위로 염탐하는 것 을 넘어서 뒤늦은 스토킹을 감행한 그가 목도한 것은 동일함의 정도가 아니라 차이의 정도였으리. 이후「내가 추적하고 있는 사진」에서 작가는 웹 공간으로 활동 영역을 옮긴다. 그는 인터넷 서칭을 통해 동일한 듯 보이는 더 많은 사진을 찾아내 한 화면에 모아 놓는다. 그럼으로써 증가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이 아닌, 그의 사진도 인터넷 공간 속 여러 사진들 중 한 장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익명성이다. 작가가 마련한 사진첩에서 '너와 나'로 맺어진 필연적 관계는 웹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우연의 산물로 추락한다.

'그'가 더 이상 '그'일 필요가 없다고 어느새 작가는 말한다.「베니스에서의 추적」에서 그는 고정된 위치에 서서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길 위의 행인들을 카메라로 뒤쫓는다. 추적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짧은 시간 동안 간편히 따라가다가 놓치고,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곧장 다른 사람을 뒤이어 따라가길 반복한다. 이 영상에서 작가의 추적 대상은 그와 개인적 인연을 맺었던 특정 인물에서 익명의 군중 다수로 확장된다. 그는 이제 아무나 뒤쫓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이렇다: 그는 누구를 통해서도 부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개인전은 박지인이 자신에게 남겨진 타인의 부재를 놓지 못한 채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시쳇말로 미련하다고 말하자면 그는 지독하게 미련하다. 대신에 나는 무엇인가를, 막연하게, 그리워하기가 그가 시간을 보내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로 자리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을 보내는 것과 사는 것은 서로다른걸 의미하지 않을 테다. 부재의 자리를 더듬던 작가의 적적한 시도는, 어느덧 삶의 태도가 되어 그를 살아가도록 추동한다. 그래서 이 전시의 제목이 선하게 그려진다. ' 스와이프 ' 는 21 세기를 살아가는 그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현대적 실천법이다. 그가 훔치는 swiping 그것이 사진이나 SNS 일지, 아니면 눈 밑의 작은 점일지, 혹은 그 점이 불러 낸 눈물일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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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퀀스, 신, 샷
Sequence, Scene, Shot


글 | 송재준



연인의 관계는 미래의 시간에 관측되기 전까지는 이어짐과 끊어짐이 중첩된 세계에 존재한다. 양방향인듯 보이는 연인의 관계는 실제로는 주관적으로 해석한 피관찰자와 관찰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일방향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찰자는 고요 속의 외침을, 피관찰자는 이를 토대로 또 다른 자신만의 소통을 하므로, 둘 사이에는 어긋남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그 틈이 벌어질 만큼 벌어져 해석과 이해가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할 때 연인은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해당 관측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그 관측과 해석이라는 것이 어느 시간대가 되어서야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나는 하나의 연이 끊길 때마다 자문하곤 했다. 이번 박지인 작가의 개인전은 내게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별로 인한 분리불안을 극복해냈을 때, 이전 시점의 '우리'를 시퀀스 Sequence에서 씬Scene으로, 다시 씬에서 샷Shot으로 기억되게 하고, 비로소 연인에서 분리된 각각의 자아로, 그리고 완전한 단일 관찰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기억의 이동통로 역할을 하는 감정선을 벗겨내는 행위가 맥락을 소거하고 인연의 맵핑을 빈약하게 만든다.

국어에는 과거를 돌이키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다. 회상, 상기, 추억, 기억 등. 이들은 미묘한 의미 차이를 가지는데, 회상은 재현, 상기는 의도, 추억은 그리운 감정, 기억은 기록과 관련한다. 이별은 우리에게 강렬한 감정을 남긴다. 감정은 특정 장소와 행위를 통해 경험을 재현하고, 상대에게 의도적 자아를 부여하여 소통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의 재생은 특정 경험을 중첩시키고 극단적으로 강화된 노드를 만들어내어 기억을 맥락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주변부의 기억은 힘을 잃고 이제 그 특정 기억 만이 하나의 외딴섬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퀀스가 씬이 되는 과정이다. 해체되고 조각난 기억의 대륙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며 감정의 공급이 차단되고, 감정의 가뭄으로 연인으로서의 특이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필연적 과정을 겪게 된다. 과거의 인연의 흔적을 쫓기 위해 시작한 중첩의 경험이, 결국 초래하는 것은 비축된 감정 소모의 가속이다. 각자가 완전한 관찰자가 되어 갈수록 의도와는 다르게 연인으로서의 감정은 증발한다.

박지인 작가의 의도는 이별을 경험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호기심의 구체적 예시일 뿐이다. 하지만 작업이 담고있는 의의란 관계란 모순적인 기억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관계는 흐름을 가진 생명이며 그 자체에 생사가 깃들어 있다. 기억의 시공간을 여행하는 우리들에게 연인 관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마도 미래에도 모순적일 것이다. 과거를 쫓는 행위가 격정적이면서도 담담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유이다. 이별을 잡는 행위는 모래를 쥔 손과 같기 때문이다.


*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그의 저서 마음의 미래에서 "존재하는 것은 마음뿐이며, 물질은 마음 속에 투영된 관념에 불과하다." 라는 말로 양자역학과 그와 관련한 주관적관념론;유아론唯我論을 정리한다. 유아론은 관찰자를 최우선으로 이외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그의 의식에 속해 있다는 학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