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마음과 얇은 땅


HEAVY HEART, THIN GROUND



2022. 10. 6  - 2022. 10. 23


정아사란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F

관람시간 | 12 - 7 PM, 월요일 휴관
기획, 글ㅣ김명진 @mjloveswhale
디자인ㅣ전혜원 @theaeonianone
음악ㅣMinOhrichar @minohrichar
사진ㅣ남민오 @minohrichar
설치ㅣ안민환 @minhwan__an, 남민오 @minohrichar
후원ㅣ한국문화예술위원회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회색지대의 아름다움

김명진 (협력기획)


“매체가 하는 일은 실재로부터 거리두기가 아니라 실재에 개입하기다. (…) 당신은 비실재적인 구멍을 통해 외부에서 우주를 들여다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 실재 안에 있다. 탈출은 없다.”[1]

정아사란의 작업은 가상공간에서의 삶의 속성을 물질로 형상화하는 일종의 ‘번역’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두 세계의 맞닿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긋남의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디지털 가상세계를 몸이 사라진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될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드웨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얇고 연약한 레이어로 본다. 이런 맥락에서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것은 없으며 마음 또한 신체라는 하드웨어를 매개한 것으로 인식된다. 인터넷 통신망과 스크린을 통해 일상의 많은 것을 경험하고 소통하지만, 여전히 그 기반에 존재하는 몸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가는 ‘중간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중간계에 머물고 있는 상태는 피할 수 없지만, 어딘가 미심쩍다. 그리고 미심쩍은 것들로 가득한 환경이야말로 우리를 치열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대해 숙고하는 아날로그 인간인 정아사란은 지금의 몸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며 가벼운 조각을 만들어간다. 스티로폼은 작가가 생각하는 중간계적인 조각 재료로, 열선으로 잘라내는 과정에서 신체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빠르고 예민하게 기록할 수 있다. 여기서 조각하는 손의 작은 떨림들은 모두 흔적으로 가시화된다. 이렇게 스티로폼으로 만들어낸 백색의 형상들은 디지털-자연물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 흘러내리는 감각, 액체적인 요소가 더해진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 단계에 있는 듯한 조형 요소들은 여러 입체와 평면 작업들을 관통하며 등장하는데, 이는 오늘의 미디어 환경 안에서의 실존에 관한 작가 자신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인터넷의 바다 위를 유령처럼 부유하면서도 머리로는 ‘어디에도 발 딛지 않은’ 상태의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마치 땅에도 바다에도 정착하지 못한 생물과 같이 <임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감각이다.

작가가 최근에 인터넷으로 주로 하는 일은 10-20초가량의 짧은 영상 클립들을 보면서 지구 곳곳의 자연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다. 무료 영상 소스로 제공되거나 상업적 용도로 판매되는 자연 이미지들은 특유의 카메라 워크와 편집을 통해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시를 위해 수집된 클립 중에는 바다 이미지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바다는 드넓은 정보 통신망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비유이자 그 자체로 매력적인 무빙 이미지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의 인식을 능가하는 범위로 인해 한정된 프레임 내에서 파편적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바다를 촬영의 대상으로 볼 때,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 점멸하는 빛의 부스러기는 자연적이면서 디지털적인 이미지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사이조각>에서 윤슬의 이미지는‘만 개의 이미지’라는 사이트를 통해 무작위로 수집된 이미지들과 겹쳐 있으며, 이미지를 매개하는 스크린은 또다시 스티로폼 조각과 겹친다. 이 작업은 스크린을 몸 사이에 끼인 존재로 그리며 완전히 가상화될 수 없는 감각을 예시한다. 

디지털 매체를 경유한 자연 이미지와 조각(몸)의 겹침은 전시를 꾸준히 관통한다. <부유하는 풍경>에서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자연 이미지, 3D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조각, 열선으로 깎아낸 스티로폼 조각이 한데 겹친다. 여기서 조각이라 표현한 것들은 파편들에 가깝다. 영상 속에서 이 파편들은 동시에 다양한 장소들을 떠돌아다니는 상태로 보이는데, 연관 없는 곳들의 짧은 클립들이 연결되며 각기 다른 장소들을 엇비슷하게 만든다. 이렇듯 스크린을 매개한 자연 경험은 구체적인 장소보다는 일반화된‘풍경’의 개념을 경험하게 한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내는 공기의 흐름, 온도, 습도 등을 포함한 총체적인 인상은 직접 경험을 통해서만 전달되며, 우리는 여행하는 신체의 감각을 잊지 못하기에 여행하는 영상을 본다. 몸 없이 이동하는 간접 여행의 경험은 어딘가 결여되어 있긴 해도 우리의 일상에 아름다움의 감각을 더해 준다.

정아사란의 최근 작업에서 오묘한 지점은 아름다움에 있다.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가상 환경을 부유하는 신체의 파편들은 이상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작가가 혼잡한 서울 한켠의 작업실에 머물면서도 꾸준히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창은 결국 인터넷이다. 그는 이 상투적이지만 멋진 자연 이미지들을 매개로 지구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 있으며, 어중간한 실존에 적응하면서 중간적인 현재의 미감을 충실히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태는 개인전에서 타인의 조화로운 침투를 허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부유하는 풍경 내에 ‘스팸’처럼 존재하는 전혜원 디자이너의 영상 <영원한 바다>는 영상 통화로 일출을 보았던 날의 기록에 기반하여 간접경험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보여주고 있다. 조각과 그래픽이라는 반대 지점에서 출발한 두 사람은, 명확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기보다는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지대에서 서로 마주치고 있기에 유의미한 공명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미감의 총체를 ‘회색지대의 아름다움’이라 부르고 싶다. 흑이나 백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것은 단지 어쩔 수 없는 고착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일종의 신념일 수 있다. 중간계에 머물며 양쪽 세계를 화해시키려는 태도는 혼란스러운 현재의 모순을 직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직면은 낯선 감각들과 공존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발견하게 할 것이다.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생각이란 무엇인가』(전대호 옮김, 열린책들, 2021), 354쪽.


*이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년도 청년예술가생애첫지원 사업을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