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S NEVER COMING AGAIN


2022. 8. 30  - 2022. 9. 11 


유지인,  하민





장소 | 온수공간 2-3F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참여작가 | 유지인, 하민
글 | 임현영
포스터 디자인 | 하민
설치 | 유병용
후원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Rewind: 부재의 장면으로 돌아가기


여름을 사랑한다고 믿는 것이 착각이어도 좋을 것이다.
그마저 여름의 산물일 것 같아서.
여름의 착각.
겨울의 착각이나 봄의 착각보다 아름다울 것 같은 이름이다.
- 황수영, 여름 빛 아래 中 1)



초저녁에 꾼 꿈은 생생하고 분명하지만 여느 때처럼 빠르게 휘발된다. 나는 방금 떠나온 세계가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길어질 밤을 상상한다. 곧 녹음(綠陰)은 빛을 바랠 것이다. 빗소리는 잦아들고, 수영장 바닥이 다 드러날 때쯤 들뜬 공기 역시 가라앉을 것이다. 여름은 모두를 기대하게 만들고는 그것의 대상을 결코 직접 (알려)주는 법 없이 떠난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결말은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한 ‘착각’은 도움이 되는가. 다시 말해, 여름이 남긴 실패는 그것을 향한 맹목적인 착각 속에 극복될 수 있는가. 이제껏 다녀간 여름의 얼굴들을 생각해 본다. 흐릿한 표정들은 잃어버린 것을 상기시킨다. 표정들 사이 벌써 그립게 된 것들이 있다. 절대 붙잡을 수 없는 꿈처럼, 너무 빠르게 지나쳐 버린 것들. 너무 공허해서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의심되는 ‘여름의 산물’들. 이들로부터 추동된 욕망과 상실감이야말로, 근원을 알 수 없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착각이다.

《Summer’s Never Coming Again》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실재적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그럼에도 현실에서 명백히 작동하는 그리움과 그것에 의해 소환된 여름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두 작가가 지닌 ‘경험한 적 없는 것들에 대한 희미한 그리움의 감정’2)은 고유한 계절 자체는 물론,특정 문화적 재현이 생산해낸 가상의 시공간-단지 ‘여름’으로 명명된-을 통과하고 있을 허구적 자신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이들은 저마다의 공백에서 출발해 여름으로 미끄러진다. 익숙함과 지루함, 애정과 증오, 호와 불호의 끝이 동일한 지점을 공유하듯, 유지인과 하민에게 여름은 입구와 출구가 연결되어 동선이 무한정 반복되는 루프처럼 탈출할 수 없는 궤도이자 궁극적인 회귀점이다. 둘은 이 계절로부터 파생되는 서로 다른 종류의 그리움에 주목하여 낡고 녹슨 기억들, 억압되거나 망각된 의미들, 기원이 모호한 이미지들이 건네는 말에 반응하고, 경험하지 못한 / 않은 / 했을 법한 것들을 모두 허용하는 개방된 기억을 호출한다.

유지인은 계절이 지나간 자리의 잔재들을 불연속적으로 모으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없는 여름의 기억을 재생한다. 그간 본인이 1인칭 주인공의시점에서 영상, 혹은 이미지의 일부가 되거나 기억 속 공간을 그대로 재현하며 작업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면, 이번에는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일정 거리 밖에서 대만 뉴웨이브3) 영화의 스타일과 닮은 화면을 연출한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경험한 적 없는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 즉 이 가공된 노스탤지어를 매개로 한 개인과 집단, 과거와 현재의 연결에 필수적이다. 아파트 단지, 학교, 놀이터 등 작가가 묘사하는 과거의 풍경은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4), 혹은 비장소(non-place)를 연상시킨다. 현실의 ‘바깥’으로서 임의적으로 조성된 그곳에서 작가가 설정한 의미들은 유보되며, 그 결과 관객 스스로가 작업과 관계 맺을 여지를 남겨준다. 화면에 등장하는 무표정한 인물(들)은 작가의 정서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것이 타자에게 전이될 수 있게 하는데, 이는 관객이 화면 속 인물과 자신을 동기화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처럼 작가가 기억하는 여름은 그의 내부에만 있지 않다. 타자의 무의식과도 연결된 작업들은 주체와의 필연적인 동일시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공유하게 되는 것은 실재했던 경험이 아닌, 알 수 없는 감정일 뿐이다.

하민은 실재와 환영을 뒤섞는 신기루적 효과를 통해 시간적 선형성에서 탈구된, ‘늘 와 있는’시간으로서의 여름을 표현한다. 그의 작업에서 여름은 사계절 중 두 번째 계절로서 6-8월을 포괄하는 기간으로서가 아니라, 불확실한 경계를 넘어 스스로를 지속하고 확장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작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일상의 이미지들은 수집과 결합을 거쳐 화면 위에 자리하게 되는데, 외부의 장면들이 내면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억의 왜곡이나 심리적 동요가 이를 불안정한 것으로 만든다. 캔버스에 겹겹이 쌓인 레이어가 드러내는 것은 축적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속적으로 깎아낸, 다시 말해 시간을 역추적해 찾아낸 잊힌 풍경들이다. 결코 전체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분절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경험과 기억의 불일치를 표상한다. 과거의 파편들은 작가의 심리적 투사를 거쳐 낯설고 예외적인 세계에 투영되며, 관객은 오일 파스텔을 비비고 긁어낸 흔적과 유채나 수채의 비균질적인 얼룩에 스스로의 물성을 투과하게 된다. 이때 여름은 화면 속 사물이나 인물들 배후에 깔리는 보이지 않는 선율 같은 것이며, 낮에 배회하는 유령처럼 미미하면서도 기존의 시공간에 포섭되지 않는 초월적인 개체로 읽힌다.

한 계절이 끝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지금,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여름에 관해 생각해 본다. 그가 사계절 내내 여름을 앓듯, 어떤 그리움은 시대나 인물과 무관하게 거듭 반복된다. 착각이 불러온 상실, 혹은 상실이 불러온 착각으로서의 노스탤지어는 먹먹하고 쓰라린 감정 속으로 우리를 자꾸만 밀어 넣는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빠져야 한다. 과거를 현재로 길어 올리고 현재를 과거로 운반하는 착각은 폐허와 충만을 한 데 묶는다. 고여 있던 시간은 그제야 흐르고, 이듬해 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잠시 ‘뒤로’ 버튼을 누르고 원하는 장면에서 멈췄다 가기. 마음껏 그리워하고, 마음껏 아파하기.


글 임현영(미술이론)





1) 황수영, 『여름 빛 아래』, 별빛들, 2022, p.13
2) 노스탤지어가 반드시 특정 시점의 과거에서 있었던 실재적 경험과 연관되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과거-미래의 선형적 시점이 해체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경험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노스탤지어를 느끼기도 한다. 관련 연구는 이 감정이 그립고 애달픈 상실의 감정인 동시에 그 상실감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라고 정의하며,그것이 특정한 시각적 형식을 통해 전이된다고 보고 있다. 이하림, 「생경한 그리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 『미디어, 젠더 & 문화』, 35(2), 2020, 189-243.
3) 배경은 넓게, 인물은 작게 그린 유지인의 작업은 뉴웨이브 영화의 대표적인 촬영기법인 ‘롱 쇼트(long shot: 멀리 찍
기)’와 ‘롱 테이크(long take: 길게 찍기)’를 연상케 한다. 관조적 화면을 생성하는 이러한 기법들은 세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려는 뉴웨이브 영화의 표현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4) 본문에서는 관찰자의 평상시 경험과 어긋난 공간, 친숙한 듯 보이나 알 수 없는 괴리감과 위화감을 유발하는 공간을의미하는 단어로 학술적 의미와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