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uble in Paradise
2022. 8. 2 - 2022. 8. 21
김선열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f
관람시간 | 12 - 7 PM, 월요일 휴관글ㅣ장기영디자인 | 전서영도움 | 박재성후원 | 강원도, 강원문화재단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관람시간 | 12 - 7 PM, 월요일 휴관
글ㅣ장기영
디자인 | 전서영
도움 | 박재성
후원 | 강원도, 강원문화재단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Trouble in Paradise>는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의 응시가 실천으로 옮겨진 전시이다. 작가는 문제적인 현실에 대해 직접 묻거나 따지는 대신, 이 모순의 수사법에 기댄다.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부조화의 현상들을, 부조화의 수사를 차용하여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무언가를 ‘지적함’으로써 절대 주어가 되기보다는, 겹겹의 아이러니를 ‘보여줌’으로써 주어의 자리를 비워둔다. 우리는 이 주어에 ‘우리’를 새겨 넣을 수 있을까.
작가는 500원을 응시했다. 누군가에겐 애호하던 점심 메뉴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값이자, 한편의 누군가에겐 버려져도 무방한 값이 된 동전 한 닢. 서울 노량진의 컵밥 가격이 500원 인상되어 애호하던 점심 메뉴를 포기한다던 이들의 소식, 그리고 암호화폐와 주식에 이어 아트테크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소식. 김선열은 이 양극단의 소식들로써 ‘화폐의 값어치’라는 아이러니를 직시했다. 모든 것을 ‘값’으로 환원할 수 있게 하던 기준, 곧 값어치의 기준이었던 화폐‘에조차’ 값이 매겨질 수 있다는 현재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것이다.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구성하고 있는 세 작품 모두에서 NFT(Non-Fungible Token) 혹은 그것의 그림자를 마주할 수 있다. 먹기 위한 먹임(가축)과 삶을 위한 죽임(축산)을 관통하는 비인간동물들, 그리고 추억-취향-일상 등 우리의 기호(嗜好)들을 텅 빈 기호(記號)로 만드는 숱한 ‘-테크(tech)’들. 이들은 모두 NFT와 맞닿고 있다. NFT는 자본의 흐름을 집약하는 ‘생산’과 ‘투자’ 행위를 또 다른 차원에서 재현한 가상화폐이기 때문이다. NFT는 대체할 수 없는, 그 자체로써 원본이 되는 화폐를 표방한다. 그러나 NFT 거래의 실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던 ‘화폐’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듯하다. 원본이 되려는 가상, 그 가상에 의하여 대체 가능한 사본으로 전락하는 듯한 실재.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 또한 ‘실재하는’ 것이 맞을까. 화폐는 가상화폐의 원본이 맞을까. 이 시뮬라크르(simulacre)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 무엇도 정의 내리거나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노멀(normal)’에 ‘뉴(new)’가 붙은 지금 이 시대를 새로운 일상의 시작으로 말끔히 정의 내리지도 않고, 20세기의 이데올로기들을 종결된 무엇으로 간편히 치부해두지도 않는다. 변화됨을 주장하는 것들에조차 드는 기시감, 다음의 세계로 넘어갔음에도 종결되지 않은 이전 세계. 이는 작가가 이전 작업에서부터 그 의미의 시효가 다한 듯한 이데올로기들(제국/식민주의, 자본주의 등)을 재현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변하지 않은’ 변화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무엇에서부터 무엇으로의 ‘변했음’을 뜻할까. 그리하여 우리가 이 전시에서 바라보는 이미지들은 익숙한 사물들의 조합이 된다. 새로움을 담지하지 않는 변화들에 대한 패러디이다. 기시감 드는 이미지들이 조합되었을 때, 우리는 이 이미지들 간 ‘사이’를 응시하게 된다. 이 순간은 곧 이 전시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패러디로서의 재현, 그러나 실재에서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재현. 우리는 원본과 사본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는 이 이미지들로부터 무슨 말을 건네받고 있을까. 이 전시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각각 어떠한 문장의 주어가 되었을까. 당신의 문장이 궁금하다.
글 장기영
<Trouble in Paradise>는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의 응시가 실천으로 옮겨진 전시이다. 작가는 문제적인 현실에 대해 직접 묻거나 따지는 대신, 이 모순의 수사법에 기댄다.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부조화의 현상들을, 부조화의 수사를 차용하여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무언가를 ‘지적함’으로써 절대 주어가 되기보다는, 겹겹의 아이러니를 ‘보여줌’으로써 주어의 자리를 비워둔다. 우리는 이 주어에 ‘우리’를 새겨 넣을 수 있을까.
작가는 500원을 응시했다. 누군가에겐 애호하던 점심 메뉴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값이자, 한편의 누군가에겐 버려져도 무방한 값이 된 동전 한 닢. 서울 노량진의 컵밥 가격이 500원 인상되어 애호하던 점심 메뉴를 포기한다던 이들의 소식, 그리고 암호화폐와 주식에 이어 아트테크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소식. 김선열은 이 양극단의 소식들로써 ‘화폐의 값어치’라는 아이러니를 직시했다. 모든 것을 ‘값’으로 환원할 수 있게 하던 기준, 곧 값어치의 기준이었던 화폐‘에조차’ 값이 매겨질 수 있다는 현재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것이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구성하고 있는 세 작품 모두에서 NFT(Non-Fungible Token) 혹은 그것의 그림자를 마주할 수 있다. 먹기 위한 먹임(가축)과 삶을 위한 죽임(축산)을 관통하는 비인간동물들, 그리고 추억-취향-일상 등 우리의 기호(嗜好)들을 텅 빈 기호(記號)로 만드는 숱한 ‘-테크(tech)’들. 이들은 모두 NFT와 맞닿고 있다. NFT는 자본의 흐름을 집약하는 ‘생산’과 ‘투자’ 행위를 또 다른 차원에서 재현한 가상화폐이기 때문이다.
NFT는 대체할 수 없는, 그 자체로써 원본이 되는 화폐를 표방한다. 그러나 NFT 거래의 실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던 ‘화폐’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듯하다. 원본이 되려는 가상, 그 가상에 의하여 대체 가능한 사본으로 전락하는 듯한 실재.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 또한 ‘실재하는’ 것이 맞을까. 화폐는 가상화폐의 원본이 맞을까. 이 시뮬라크르(simulacre)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 무엇도 정의 내리거나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노멀(normal)’에 ‘뉴(new)’가 붙은 지금 이 시대를 새로운 일상의 시작으로 말끔히 정의 내리지도 않고, 20세기의 이데올로기들을 종결된 무엇으로 간편히 치부해두지도 않는다. 변화됨을 주장하는 것들에조차 드는 기시감, 다음의 세계로 넘어갔음에도 종결되지 않은 이전 세계. 이는 작가가 이전 작업에서부터 그 의미의 시효가 다한 듯한 이데올로기들(제국/식민주의, 자본주의 등)을 재현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변하지 않은’ 변화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무엇에서부터 무엇으로의 ‘변했음’을 뜻할까.
그리하여 우리가 이 전시에서 바라보는 이미지들은 익숙한 사물들의 조합이 된다. 새로움을 담지하지 않는 변화들에 대한 패러디이다. 기시감 드는 이미지들이 조합되었을 때, 우리는 이 이미지들 간 ‘사이’를 응시하게 된다. 이 순간은 곧 이 전시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패러디로서의 재현, 그러나 실재에서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재현. 우리는 원본과 사본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는 이 이미지들로부터 무슨 말을 건네받고 있을까. 이 전시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각각 어떠한 문장의 주어가 되었을까. 당신의 문장이 궁금하다.
글 장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