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면환상

2022. 8. 2  - 2022. 8. 14 


양형지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2f

관람시간 | 12 - 7 PM, 월요일 휴관

기획도움황예지
글ㅣ김예솔비

포스터 디자인 | 황아림
크리에이티브 코드 | 양준수
목소리 | 김예솔비, 박정연, 우지안, 황아림
도움 주신 분 | 박미정, 손웅비, 유희정, 정은채, 주여름, 홍지영
설치 | 김예진, 박형호

리서치 후원 | 서울문화재단
공간 지원 | 온수공간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 입니다.
*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흐려지기라는 전략 / 환상의 방 

김예솔비 


0.
이 방 가득히 내 냄새가 난다. 내가 버린 것들이 나의 방과 다르지 않아서 우리는 운명을 함께 한다. 지금 방이세요? 화면 속 상담사가 물었다. 나는 그만 “네. 저에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배경이 흐려지도록 설정했기 때문에 방의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팔을 움직이고 내가 놀란다. 여전히 방에 발이 닿지 않는다. 이 방은 나를 집요하게 추격하다가도 중요한 순간에 나를 놓친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공간의 균형이 확신을 잃어서, 내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화면 속에서라면 그림자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윤곽 주변으로 뭉개지고 있는 방. 흐릿한 픽셀들. 도망칠 세계는 거기에 있는 것만 같다. 디폴트-모드-에리어(DMA)라고 했던가? 상담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때 뇌에서 오히려 활발해지는 부위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을 상상하자 화면과 방의 경계를 뚫는다. 방이 한껏 열린다. 아니, 닫히고 있나? 우리는 수백 개의 방으로 동시에 나아간다. 

이것은 나의 상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얼마간은 내 경험과 맞닿아 있지만, 여기에는 전시장에서 들리는 문장들과 전시장 한 켠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 속에서 빠져 나온 문장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기억의 촉매제가 되어 사뭇 몽상적인 기분으로 방에 관한 내밀한 경험들을 소환하게 한다. 확실한 것은, 이 전시장 안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불러들이고 일으킬만한 공감대가 있으며, 두루뭉술한 기분을 하나의 구체적이고 공통된 감각으로 묶어낸다는 것이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 울렁거리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질문들을 쥐고 물렁하게 입장하는 것은 이 전시장에 발을 들이는 가장 정확한 방법 중 하나일 테다. 


1.
여성들의 우울은 현기증과 같은 감각 속에서 전개되며, 정돈된 언어로 형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환상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전시의 제목인 ‘입면환상’은 수면에 돌입하기 전, 잠과 각성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환각을 의미하는 용어인 ‘입면환각(hypnogogic hallucination)’에서 빌려온 것이다. 작가는 악몽이나 착시, 가위눌림 같은 부정적 경험과 연관되는 ‘환각’의 자리에 ‘환상(fantasy)’을 대입함으로써 붕 뜬 것과 사이-세계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감정의 확인을 통해 여성들이 서로 연결되는 자리를 모색한다. 어디에도 안착하지 않는 틈새의 자리, 우울의 낮은 감각과 흐릿한 공상의 영역을 점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과장된 이성과 확신들로 넘쳐나는 세계를 향한 반동이 된다. 

환상은 규칙들을 교란시키고, 익숙한 것들 간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전시는 여성과 방의 관계를 다뤘던 유구한 투쟁의 궤적을 연상시키며 그 관계를 다시금 조정하고자 한다. 여성의 우울과 방은 예로부터 지독하게 얽혀왔다.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의 어려움을 설파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방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자유 그 이상을 의미했다. 부엌이나 일터, 어디에나 열려있는 공간, 그러므로 사실상 어디에도 없는 자리, 자리없음(nowhere)로 추방당했던 것이다. 한편 지금에 와서는 또 한 겹의 어려움이 덮치고 있다. 여성들의 자취방은 너무도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된다. 여성들의 방이 무균실과 같이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만 여성들이 심적으로 가장 편안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외부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상상하고 있는 가상의 방은 내부를 향해 닫히는 방이 아닌, 외부를 향해 끝없이 열리는 방이다. 전시는 가상 현실 이미지라는 비물질적인 자리를 빌어, 타인에게 보여짐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힘을 통해 친밀해질 수 있는 방을 상상한다. 그러므로 전시는 방이 단순히 한 사람에게 귀속된 특수한 공간이라기보다는, 그 사람 혹은 여성 전체를 둘러싼 환경적인 요인에 가깝다는 것을 구현한다. 전시는 여성이 방을 갖는다는 것이 함의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환기하면서, 환상을 통해 방과 여성의 관계를 새롭게 재조합하며 돌파의 순간을 자아내고자 한다.


2.
전시의 구심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영상 작업 <Blurry room>이다. 영상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우울과 같은 심리적 병인을 겪은 여성의 몸에서 DMA라는 가상의 화학물질이 발견되었고, 연구 결과 DMA가 오래된 화석의 형태로 이미 해양과 대륙의 지층 곳곳에 침투해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이 <Blurry room>의 세계를 지탱하는 가정이다. 이는 여성의 우울을 자연계 시스템의 거시적인 구조 속에 위치 지음으로써 그 복잡다단한 층위를 가늠하고 상상을 급진화해보자는 작가의 제안이기도 하다.

영상은 DMA를 추출하는 시추선과 그 시추선에 탑승하고 있는 유일한 여성연구원 h의 음성으로 전개된다. 집약된 DMA가 해체될 때 이들은 ‘방’의 환상을 마주하고, 그것은 “자주 놀러 간 친구의 집”처럼 익숙하거나 “누군가의 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타자의 기억과 감각을 탐식하는 듯한 체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H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이 환상을 점차 “자신의 살점”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 방과 방들은 바닥과 벽, 경계와 한계를 무너뜨리며 서로를 삼키고 배설하는 거대한 체계가 된다. 방이 해체되고, 우울의 언어들이 스스로를 더욱더 첨예하게 표출할수록 시추선은 점점 강해진다. 이때 자신을 터뜨려 H를 삼키려는 시추선과 H의 관계는 공동체로서의 여성-우리와 나 사이의 관계를 느슨하게 비춘다. H와 시추선은 신진대사를 일으키는 것처럼 서로를 흡수하고 분열하며 변화할 것이다.

<Blurry room>은 우울의 표출이 동력을 발생시키고, 강해진 서로가 서로의 함몰될 곳이 되어주는 대안적인 ‘(선)순환’을 상상한다. 영상의 끝에 다다르면 h는 상담자의 언어를 수행적으로 구사하며 영상을 보고 있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장 깊은 정동을 응시하는 체험으로 유도한다. 그 순간, H의 현기증은 관객에게 전이되고, 전시장은 그 자체로 영상 속의 ‘방’, “Blurry room”으로 오버랩 된다. 형용사 ‘blurry’는 여성적 우울과 정동의 ‘모호함’으로 손쉽게 해석될 수 있지만, 여성들의 방이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펼쳐지는 전략으로서의 ‘흐려지기’로 읽어낼 수도 있다. 전시장에서 여성들은 서로의 우울을 확인하고, 각자의 음울한 자리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닌, 각자의 내밀한 우울을 들켜도 괜찮은,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나와 타인의 흐릿한 경계 속에서 서로를 비호하는 방으로 입장하게 될 것이다.


3.
한 여성이 가진 우울을 탐구하는 일이 ‘나’에게 스며든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감정의 골 속에서, 우리는 분열하는 세포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묶이며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사유는 현대 건축의 개념인 메타볼리즘(metabolism)의 아이디어와도 공명한다. 생물체가 환경에 반응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유기적인 도시의 생장을 지향했던 건축 운동은 전시장에서 여성의 정동과 연대 정신 사이의 상관관계로 재해석된다. <반향>은 파편적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느슨한 결합을 통해 이러한 영구적인 상생의 순환 구조를 감각적으로 체현한다. 연결되었다가도 떨어지는 문장과 이미지 속에서 온전한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간 불확정적으로 남아있으면서 서로를 무한히 반향하는 것들. 무작위적인 들숨과 날숨, 찰나의 접속과 영영 의미를 잃어버린 말들. <반향>은 바로 이들 사이에서 반사되고 흡수되는 모종의 힘을 내밀한 체험으로 쥐여주는 작업이다. 음성이 같은 크기와 모양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사진이 엄격하게 제한된 프레임의 비율을 갖는 것은 각각의 소리와 이미지가 공유하는 동일한 의식의 ‘터’를 감각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그 터는 서로에게 흡수된 유기체로서의 여성들이며, 펼쳐진 하나의 몸-세계다.

사라 아메드는 우을증자들을 ‘정서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정서 공동체가 하나의 방향을 보고, 행복과 상실의 대상을 공유할 때, 이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정서 이방인들은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알지 못하고, 방향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상실의 실체 없음 속에 함께 있다는 깨달음이, 방향의 어긋남이라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착종된 방향 속에서 이방인들이 서로의 보이지 않는 눈빛을 교환하고, 들리지 않는 말들에 귀기울인다. 그 몸짓 속에서 단 하나의 긍정을 본다.


1) 325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작가는 2년 전, 경계성 인격 장애와 조울증을 진단 받았다. 병명을 부여한 의사는 약을 건네며, 이 약을 먹는 순간부터 나만 찾아오게 될 것이 라는 말을 했고, 작가는 그 약을 복용하면서 환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환각을 곧 건축 공간의 해체로 받아들였고, 상담의 언어에서 장소성을 구현하는 힘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상담의 언어가 장소/기억을 더듬거리며 재인식하는 행위에서 연결과 전복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입면환상>은 상담의 기법으로 표출된 여성들의 우울과 정동을 방이라는 공간의 전략으로 환유하는 프로젝트다. 작가는 상담에서 익힌 채굴의 언어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더듬거림의 경험을 공유 받았다. 여성들의 우울은 매우 특수하고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무기력으로 환원되며 미미하게 다뤄져 왔다. 쉬이 해소되거나 발화되지 못한 우울은 다시금 각자 내면의 공고한 ‘방’ 속에 퇴적됨으로써 사적인 우울로 추상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해온 것이다. 본 전시는 우울의 개인화 대신 직설적인 형상화를 통해 공적인 소통의 발로를 제안한다. 여성들의 증상을 통과해 방으로, 건축적으로 설계하기를 자처하며, 작가가 세운 가설을 세포와 방, 시추선이라는 거대구조의 모습으로 공고하게 짓고, 또 무너뜨린다. 가장 내밀한 감정들을 가둬둔 관념적인 ‘방’들이 직설적인 공간-이미지로 변환될 때, 우울과 환상을 맞교환하는 전복의 에너지가 들끓는다. <입면환상>은 궁극적으로 방(들)의 유기체를 구축하여 서로의 우울을 확인하고 연결되는 연대의 장을 구축하고자 한다. 

<Coded Mirror>은 두 번째 전시 공간인 <Blurry Room>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이자, 동시대의 통과의례이다. 작가는 카메라를 마주한 대 상의 얼굴을 무작위로 삭제, 분열시킨 후 컴퓨터가 선택한 순간의 얼굴로 각각의 부위를 재배치한다. 얼굴의 특정 부위가 재생되고 배치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미지 간의 충돌과 왜곡, 지연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무수히 생성되는 과거의 단면적 분열이자 한 사람의 동일성에 대한 외재적 인식의 대상인 얼굴을 해체하여 모든 사람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상 작업 <Blurry room>은 여성적 허무를 응시한다는 취지의 프로젝트인 <허의 환경>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작가는 “당신의 우울을 방종 할 방을 건설하라”는 제안에 응답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통해 발굴한 문장과 묘사를 환상의 재료로 삼는다. <Blurry room>은 우울에 관한 진술을 방이라는 공간 경험으로 치환하며, 수많은 방들이 서로를 향해 개방되고 뒤섞이는 감각을 SF적인 상상력으로 구현해낸다. 

<반향>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을 통해 이러한 영구적인 상생의 순환 구조를 감각적으로 체현한다. 작가는 앞서 언급한 프로젝트 <허의 환경>을 통해 모인 9명의 여성과의 개별 대화를 기록한 뒤 또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로 문장들을 재구성했다. 사진들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고, 음성은 화답하고 마찰하며 서로를 향해 물결치는 파형이 된다. 










양형지(b.1995)는 건축을 전공하고 집을 짓는 일을 한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촉발되는 개인적 감정과 지어지지 않는 건축에 관심이 있 다. 건축을 기반으로 사진, 출판,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현실의 질서 위를 부유하는 공간이자,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내정상태)에 활성화되는 회로(Default Mode Network)에서 착안한 플랫폼, DMA(Default Mode Area)를 운영하고 있다. VR 그룹전 <Space Simulation>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