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2022. 3. 18 - 2022. 4. 2


권상록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 F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음악 | 권상록
글 | 안준형
영상 | 남동현
포스터디자인 | 김보용
설치 | 안상영, 김재원
홍보 | 조민수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입장해주세요.










샤이닝: 소실속에서 나타남

안준형


디지털 환경에서 쓰이는 데이터 파일은 실제 세계에서의 썩고, 낡고, 바스러져 사라지기 마련인 물질이라는 관념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컴퓨터 속에 저장된 파일은 마치 잘 관리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낡지도 변형되지도 않을 것만 같다. 그것은 차라리 지식이나 정보와 같은 비물질적인 무언가처럼 보인다. 이같은 독특한 물질 환경은 예외적이나마 실제 세계에서의 엔트로피적 시공간에 저항하는듯한 가상적 공간을 형성했다. 이러한 디지털 공간 속의 아찔한 무시간성에 의해 한편으론 ’잊힐 권리‘와 같은, 어쩌면 당연한 사회적 저항의 흐름 또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디지털 데이터가 영원에 가까울 것이라는 인상과 달리 데이터 파일 역시나 물리적인 저장매체에 기입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선 결국 손실되고 풍화되기 마련이며, 누구나 한 번쯤은 휴대전화를 잃어버린다거나 USB가 고장난다거나 하는 식의 사소한 계기로 경험해 봤을 일이다. 권상록 작가 또한 이같은 디지털 물질 환경에서 겪은 상실의 경험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2000년대 초 약 3년간 서비스하다 운영을 종료했던 어떤 한 MMORPG를 지목하며, 자신의 회화 프로젝트가 당시 그 게임을 플레이했던 경험을 쫒으며 출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주어지는 데이터는 전통적인 패키지 게임에서와는 달리 플레이어가 사적으로 저장하고 실행시킬 수 없다. 패키지 게임은 한번 구매하기만 하면 설사 개발사나 퍼블리셔가 망해 사라지더라도 구매자에게 데이터가 보관되고 또 재설치되며 계속해서 플레이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우리는 그 게임 세계 속을 다시금 거닐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온라인 게임은 서비스가 종료되면 다신 게임에 접속할 수 없게 된다. 설령 플레이어가 게임의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았더라도, 정작 게임을 실행시키고 게임에 접속할 수 없게 되니 무용지물이다. 그곳에서의 시간과 경험은 마치 현실에서처럼 끝이 예정되어 있으며 반복되지 않고 되돌아오지 않는다. 작가의 회화 프로젝트는 이같은 특정한 디지털 환경에서의 소실되고 차단된 경험을 더듬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풍경의 이미지로 기억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게임에 관한 경험을 풍경으로 기억하는 일이 실은 그다지 생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의 지체도 허락하지 않는 듯 보이는 경이로운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발달 덕택에 게임의 그래픽 이미지가 만들어낸 풍경을 보고 감탄하는 일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감탄의 순간마다 관성적으로 스크린샷 이미지를 찍어 남기고 그 데이터를 보관하기 마련이다. 작가가 플레이하였다는 MMORPG 게임 또한 서비스를 종료한지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경험을 기록한 스크린샷 이미지들이 여전히 잊히지 않은채 웹상에서 떠돌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경험을 쫒아 재현하겠다는 작가의 동기는 바로 그 스크린샷 이미지를 찾는 일로 소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몇 년간 이어지고 있는 그의 회화 프로젝트가 방증하고 있듯, 결코 당시 경험한 풍경의 이미지는 그런 스크린샷 데이터로는 충분히 재현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줄곧 언급하는 ’풍경‘이란 대체 어떤 ’풍경’일까?


일단 게임에 관한 경험에 있어서 ‘풍경’은 얼마만큼 관여하고 있을까? 달리 말해서, ‘풍경’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 얼마만큼 관여하고 있을까? 아마도 풍경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닌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게임의 그래픽에 감탄하고, 이를 게임에 대한 1차적인 감상과 때어놓을 수 없는 듯 여기더라도, 사실 게임의 그래픽은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선 충분히 타협될 수 있는 옵션으로 주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개인이 가진 하드웨어의 성능에 맞춰 옵션으로 주어지는 그래픽의 단계를 재설정 할 수 있다. 이 시각적인 볼거리로서의 그래픽 이미지는 게임 플레이에 관여하긴 하나 가변적이고 부차적인 셈이다. 하지만 그럴 터인데, 나는 간혹 게임의 ‘풍경’이 외려 종속되어 있어야 할 ‘플레이’의 감각 자체를 압도해버리는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사실 그때 나타나는 ‘풍경’은 시각적인 그래픽 이미지로서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지금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는 주관의 감각이 갑작스레 소실되어버리고, 그 때문에 불가피하고 또 과도하게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상에 가깝다. 유독 ‘오픈월드’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할 때 종종 느끼곤 하는 이 독특한 불능감은 게이머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보았을 일이다. ‘오픈월드’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게임이 진행되는 데에 있어서 정해진 플롯이 없거나 아주 희미하며, 말 그대로 오픈된 세계 속에서 플레이어의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 그 자체가 놀이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자유도, 다양하게 놓인 선택지들 앞의 막막함 덕택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 게임을 도대체 어떻게 즐기면 좋은 일인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주어진 플롯이 없는 이유로 우리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해야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같은 플레이어 주체의 불능감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플레이어에게 남겨진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작가가 줄곧 이야기하는 풍경 이미지 또한 단순히 시각적인 그래픽 이미지에 대한 경험, 다신 접속할 수 없게 된 특정한 가상 세계에 대한 경험의 상실감 같은 것보다도, 앞서 이야기한 디지털 가상 세계에서 발생하는 불능감과, 그로 인해 마주치게 되는 세계의 상, ‘주관이 관여하지 못하게 된 세계 속의 풍경’을 재현하는 이미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그의 회화 프로젝트는 디지털 환경의 물적 조건에서 나타나게 되는 특정한 불능감에 빠진 주체에 의해 기인하고, 나아가 이를 재구성하는 시도의 일환이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의 작가 노트와 작품 사이에 놓인 가장 눈에 띄는 모순 하나는 풀이될 실마리를 얻게 되는 셈이다


작가는 줄곧 자신의 회화에서 ‘풍경’이 주요한 키워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말과는 달리 전시장에 놓인 회화 대부분은 언뜻 보기에 풍경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인물화로 구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도 그의 회화에는 꼭 인물이 전면에 놓여있기 마련인 이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은 흔히 ‘NPC’ 혹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불리는 게임속 존재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흔히 인물화 속에서 구체적인 한 개인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라는 유형과는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살과 피부, 뼈와 피, 그리고 구체적인 개인의 얼굴 대신 ‘폴리곤’과 ‘텍스처’로 주조된 그들은 게임 속에서 그 어떤 입체적인 행위를 한들, 그 어떤 깊은 서사를 관통한들 끊임없이 어떤 공백을 비추는 존재다. 작가의 지난 개인전 제목 중 하나인 ‘이야기를 동경하는 이야기’가 제법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이유다. 나아가 이번에 전시된 <로딩>, <로딩중>, <지난 후>에서 그려진 것처럼 인물이 세계와 구분되지 않으며, 완전히 겹쳐진 듯 함께 나타나고 또 사라지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사물들의 풍경속에 배치되어 있는 한 부분처럼 있을 뿐이다. 그의 회화 전면에 놓인 인물들의 형상에도 불구 여전히 그의 회화가 풍경화로 남아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앞서 이야기했듯, 주관의 상실감 재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