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날씨

2022. 2. 17 - 2022. 3. 14


이 현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 F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글ㅣ최정윤
사진ㅣ민병훈




*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출입명부를 작성해주세요.













무의식의, 본능적인, 우연한

최정윤(독립 큐레이터)

 
우리는 매일 많은 것들을 보면서 살아간다.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컴퓨터 등 각종 전자기기는 우리로 하여금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예전에 사진은 실제를 대신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었지만, 요즘은 손쉽게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그만큼 보이는 것을 다 믿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포화인 시대, 볼거리도 넘쳐난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본다. 그래서인지 눈을 감아도 수많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하다. 수많은 종류의 볼 것들 중에서 무엇을 볼 지 결정하는 것마저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미지 과부하의 시대를 살아가는 회화 작가는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있을까? 


이현의 이번 전시 <아주 사적인 날씨>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대부분 순지에 연필로 그린 그림이다. 연필로 그린 그림이다 보니 검정색과 바탕의 종이색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분명 총 천연색, 초고화질로 펼쳐진 우리 앞의 수많은 이미지들과 다른 인상을 준다. 감상자는 오래된 흑백사진을 마주할 때처럼,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해 멈춰 있는 한 장면만을 보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펼쳐질 법한 이야기를 쫓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내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물결치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표면이다. 이러한 선들은 산-집-길-언덕 할 것 없이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가득 메우며 이어진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화면은 대체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바라보고 그리는 사람이 꽤 높은 공간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것 같다. 앞서 선들이 ‘내장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내장 같은’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visceral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강력한 감정에서 오는, 본능적인’이라는 뜻 역시 갖고 있다. 이현의 이러한 선들은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처럼 강력하게 다가온다. 이는 기괴하게 보이면서도 동시에 귀여운 이중성을 가진다. 또한 하늘 위에 부유하고 있는 커다란 구름과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을법한 사람의 부재가 눈에 띈다. 그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마을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걸까?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사진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지만, 예술 작품 전반의 이해에 있어서도 적용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투디움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에 따라 작품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푼크툼은 개인의 경험이나 취향에 따라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푼크툼은 라틴어로 ‘찔린 상처,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로 새겨진 표식’을 의미하는데, 사진의 세부적 구성요소를 통해 감상자의 뇌리에 불현듯 찾아오는 정서적 울림이며, 이러한 감각은 논리 보다는 우연적 상황을 기반으로 발생한다. 작가는 “어떤 장면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게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영화 <메리 포핀스(Mary Poppins)>를 보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흐린 날이 주는 행복한 기억을 꺼내 들려주었다. 환상의 문을 통해 제 3의 세계로 떠나는 특별한 기억 말이다. 그 곳은 불안하고, 불완전한 현실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세계다. 흐린 날씨는 그에게 일종의 ‘푼크툼’처럼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울림을 주는 요소다. 그러나 감상자가 그만의 감정과 경험을 담은 상상의 세계를 그가 느낀 것과 똑같이 느낄 수 없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작가는 작품을 제작할 때 완벽한 전체 스케치 없이 부분에서 시작해서 계속 이어져 나가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이러한 방식 역시도 계획적이기 보다는 우연에 기대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일관적이다. 작가가 주로 사용했던 단어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 중 하나는 ‘무의식(unconsciousness)’이다. 무의식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일상의 정신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마음의 심층을 뜻한다. 무의식에는 식욕, 성욕, 수면욕, 소유욕 등 본능적 욕구 등 충족되지 못한 본능적 욕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금기된 욕망이나 상상, 더 나아가 어린 시절의 경험, 트라우마, 콤플렉스까지도 포함된다. 무의식은 정신 구조에서 에너지원이 되며, 전의식을 거쳐 사회적인 모습으로 의식에 도달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중요하게 여겼던 미술사조로 192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초현실주의(surrealism)을 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졌던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는 예술 운동이다. 이현은 초현실주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내적 세계를 작품에 담았다. 비정상적이고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상 속의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정상에 대한 도전이며, 아무런 제약 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현의 작품에서 ‘집’은 안정, 편안함, 안락함, 평온, 휴식, 추억, 향수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이동’은 변화, 불안, 결핍, 위태로움을 나타낸다. 여러 개의 집과 그 집들 사이를 이동하는 탈 것, 그리고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커다란 구름까지. 그의 작품은 정주와 이동이 공존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의식의 세계에서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기억이나 트라우마, 욕구는 꿈이나 실언, 실수, 농담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작가는 상상적 세계를 현실에 노동집약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일종의 자기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감상자는 이러한 무의식적 욕망의 무대, 장면을 보면서 현실의 질서와 제약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세계를 탐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