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메들리 WALKING MEDLEY

2021. 10. 16 - 2021. 11. 2 


엄지은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1F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협력기획 | 유진영
공간 디자인 | 염철호, 구재회
그래픽 디자인 | 모조산업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출입명부를 작성해주세요.
*전시장 인원이 층당 4명 이상라면, 조금 기다리셨다가 관람 부탁드립니다.










땅과 하늘, 바다가 있다. 그리고 땅과 하늘을 잇는 빛, 먼 과거의 해일과 소금밭, 눈이 덮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걷고 또 걸어도 닿을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분이다. 엄지은의 두 번째 개인전 ≪워킹 메들리 Walking Medley≫는 인간이 딛고 있는 땅을 기반으로 여러 서사들을 교차해나가며 현실과 환상 사이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현실과 환상은 서로를 지지체 삼아 긴밀하게 연결되어 존재한다. 픽션, 가상, 허구 같은 낯익은 단어로도 치환이 가능한 환상은 언뜻 보기에는 현실적인 것에 전혀 발을 딛고 있지 않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일정 정도의 현실적인 것을 함유해야지만 비로소 더 그럴싸한 것으로 부풀려질 수 있다. 현실 역시 그리 사정이 다르지는 않은데, 이들은 적당한 속임수를 겸비한 환상의 힘을 빌릴 때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얻게 된다. 엄지은의 작품은 그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며 현실과 환상을 기이하게 오간다. 이때, 그가 두 축을 아우르기 위해 선택한 도구는 ‘걷는 사람’이라는 물리적 실체이다. 1인칭 시점의 핸드헬드로 성기게 촬영된 장면들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는 이와 보는 이 사이의 거리를 극도로 좁혀주며 모든 행위에 대한 일말의 믿음을 담보해주는 증서와 같이 작동한다.

이전까지의 여러 작품에서 반복해서 등장해온 ‘걷는 사람’은 타인의 이야기와 기억들을 채집해 그것을 자신의 움직임과 교차시킴으로써 신앙, 종교, 그리고 일상적 미신까지 믿음직한 것들의 형태를 무화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엄지은은 ‘걷는 사람’을 중심에 두되, 구체적인 언어를 점차 소거하고 추상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화음을 쌓듯 하나의 풍경을 쌓기를 시도한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걷는 발은 소복이 쌓인 눈길 위에 내딛은 발자국으로 연결되며, 새하얀 소금밭은 발자국이 얼룩덜룩 남은 눈밭이 되어버린다.

점차 말과 기억, 움직임을 잃어가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해일의 노래>는 이야기 속 미지의 장소를 좇는 사람의 걸음을 통해 마주치게 되는 허구적 현실을 그린다. 한편, 앞뒤 사람과의 간격을 유지하며 설산을 오르는 <워킹 메들리> 속 ‘걷는 사람’은 비틀비틀 눈밭을 헤치고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 연신 이어지는 걸음 중 삐죽 튀어나와 화면 위로 포개지는 다른 질감과 질량의 장치는 마치 꿈처럼 무어라 형용하기에는 어려운 환상의 영역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현실과 환상이 단지 한 겹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등을 맞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서로 다른 두 축의 경계를 가시화하는 것일까? 교차되거나 포개어지는 화면의 레이어는 점차 정확한 구분을 위한 의미를 잃고, 추상화된 공간 속에서 걷는 발은 말하는 자의 것이었다가, 움직이는 자의 것이 되고, 이내 보는 이의 것이 된다. 하늘과 바다, 땅 역시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불분명하고 실체 없는 것들을 위한 미지의 통로는 전시장 곳곳에 제멋대로 놓인 방지턱에 의해 마련된다. 애초 엄지은의 과거 작업에서 집의 길흉화복을 막기 위해 놓는 풍수지리적 믿음의 응집체였던 방지턱은 오행이라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들이고 내보내는 존재로 발전되었다. 물질화된 형태로 모인 자연적 에너지는 서로 기대어 공간과 작품 전체를 잇는 길을 만든다. 이로써 ‘발’로 대변되는 현실과 환상, 두 축을 지지하던 물리적 조건의 전제는 풍경 속 모든 존재의 물리적 조건을 묻는 일로 확장된다. 이들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엔 대부분의 비슷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현실과 환상의 교묘함이 그 구분을 헷갈리게 할지라도 현실을 환상의 이면으로, 환상을 현실의 조각으로 단순화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솟아오르는 불일치의 순간에 현실은 환상의 방법론으로 새삼스레 자각된다. 거리를 유지하며 걷다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자 갑작스레 맞닿은 다른 이의 몸을 통해, 혹은 무심코 뒤집은 돌 밑의 살아 움직이는 게를 통해 우리는 두 축의 경계에서 환상에 부재하는 현실의 질량을 찾는다. 

유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