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

2021. 10. 16 - 2021. 11. 2 


정주원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2F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글 | 콘노유키
그래픽 디자인 | 마카다미아 오!
공간 디자인 | 양새봄
설치 | 홍민희
사진 | 홍철기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출입명부를 작성해주세요.
*전시장 인원이 층당 4명 이상라면, 조금 기다리셨다가 관람 부탁드립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속에서 ㅡ 
막연함 속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콘노유키


어떤 풍경이 있다. 결코, 소유할 수 없고 압도적인 광경은 우리 앞에서 막대하게 펼친다. 우리는 그 풍경을 보고 압도당한다. 풍경을 마주할 때 생기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은 정말 감각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곧 이 풍경을 장악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압도적인 풍경은 그림으로, 망원경으로, 관광 엽서로, 카메라를 통해서, 바탕화면으로 전달되어 사람들에게 뷰(view)를 제공한다. 기록 매체를 통해서 이와 같은 장악할 수 없음은 문자 그대로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풍경은 어쩌면 이런 전도(顚倒)—압도와 소유의 거리를 해소하는 일—를 애초부터 기대했었을 지도 모른다. 풍경을 구성하는 핵심은 거리와 거리감을 유지한 채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점이다. 저 멀리 보이지만 내가 관심을 보낼 수 있는 대상, 그것이 풍경이다.

풍경에 대한 이와 같은 묘사는 종종 사랑을 상기시킨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큼은 가까운 사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지만 나에 가까운 존재, 이유는 뭐라 할 순 없고 그냥 좋다는 감각. 이처럼 풍경과 사랑은 상통하는 점이 있다. 둘 다 모두 거리와 거리감을 내게 가깝게 접근하면서도 유지하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렇다면 정주원의 이번 개인전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에서 사랑은 풍경으로서 어떻게 나타날까. 
정주원의 작품은 사랑이 끝난 후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때 그림은 사랑의 내밀함과 그 내밀함 속의 간극을 내포하고 전달한다. ‘사랑이 끝난 후’라는 시점(時點)은 존재와 부재의 양태 사이에 풍경으로 자리한다. 그 풍경은 ‘사랑이 아님’ 또는 ‘사랑이 없음’이라는 부재나 소진된 결과가 아니다. 그림은 사랑이 끝난 후의 시점에서 출발하는 ‘그때의 사랑’과 ‘여전히 지속되는 사랑’을 구분 짓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한때’와 ‘여전히’는 구분 지을 수 없다. 

'한때’가 정말 한때에 머문다면 우리는 한때를 그리워하지 않고, ‘여전히’가 여전함에 머문다면 우리는 소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때의 사랑’과 ‘여전한 사랑’은 모습을 구분해놓을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남아 있는 풍경이다. 사랑이 끝난 후라는 시점은 궁극적으로 그 시점(時點)이 내밀한 시점(視點)이 되어 풍경은 그곳에 모습을 나타낸다. 작품이라는 풍경은 뷰로 고정된 풍경에 앞서 존재하는 막연함에 보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 그대로 펼쳐져 있는, 마치 대기 같은 무언가는 장악하거나 온전히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다. 거리를 계속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주는 주체는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곳에/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주는 또는 준 주체는 그곳에 함께 빠져들었던/빠져 있는 어느 누군가이다. 
     
그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인 어느 누군가만이 사랑이라는 명목—명시된 목적—의 결과 대신 사랑을 어떤 것이든 이름할 수 있다. 사랑은 논리의 결과(理窟이굴)가 아니면서 동시에 그 이름 속에 사는 어떤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사랑의 장면인지 알 수는 없더라도 그들은 사랑 속에 있었다. 작가가 화면에 담은 모습에서 결과적으로 사랑은 특정 형상이나 표현에서 더 멀어진다. 전시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는 어떤 이름 속에 살던 사랑의 양태를 익명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속 풍경은 우리에게 먼 동시에 사랑 속에 살던 이들에게도 지금은 멀다. 그렇다면 사랑은 정말로 끝났을까? 허무한 풍경으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목젖까지 던져버렸을 때, 그 최선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말하고 명명할 수 있을까? 봐도 모를, 알아볼 수 없는 그것들은 이름이나 명목을 뒤로 한 채 등장한다. 

우리는 그 풍경을 가장자리로 삼는다. 사랑이 끝난 후의 풍경은 사랑의 끝도, 풍경의 끝도 결코 아니다. 그곳은 사랑이라 명명하는 공간으로서, 지나고 보니 사랑이었다는 사후적 인식이 오히려 사랑을 그려내기 시작하는 가장자리가 된다. 작품에 그려진 풍경은 결코 알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막연함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우리에게는) 막연함 속에 있던 어느 누군가만 할 수 있다. 거리를 계속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사랑이라는 이름을 주는 주체는 보기만 하는 주체가 아니다—함께 있었다가 되돌아봤을 때, 그 누군가가 비로소 사랑이라 이름한다. 목젖까지 던져버렸을 때—그만큼 최선을 다했을 때, 목소리는 마르고 닳아버렸을지라도 사랑이라는 이름 속에 메아리친다. 이 메아리는 작가가 그린 사랑이 끝난 풍경 속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은 잘 들리지 않을 뿐이지, 누군가를 향해 사랑을 외친 건 그 누군가—나, 당신, 너, 자기, 우리 애, 그리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