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풍경 WATERSCAPE

2021. 9. 25 - 2021. 10. 13 


박소현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2-3F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2 - 7 PM, 휴관 없음

글 | 권정현
공간설치 | 정진욱
디자인 | 마카다미아 오!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출입명부를 작성해주세요.
*전시장 인원이 층당 4명 이상라면, 조금 기다리셨다가 관람 부탁드립니다.








순간을 담는 그림 
권정현



그날은 냄새가 특별했다. 계절이 바뀔 때 코끝에 닿는 청량한 공기가 냄새로 느껴졌다.
그 순간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는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대답뿐이다. 막 가을이 된 바람이 불던 날이다.


청금석, 산호, 조개, 석황, 황토 등을 재료로 만든 가루 물감에 물과 아교를 섞고 잠시
기다린다. 큰 입자는 아래로 가라앉고, 작은 입자는 위로 뜬다. 아래는 진하게, 위는
맑게. 하나의 색은 층층이 다른 색이 된다. 그 무한대의 스펙트럼에서 하나의 색을
골라 얇은 한지 위에 쌓는다.


그 순간을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 기억은 형체가 없고 이리저리 모양을 바꾼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처럼 미끄러져 흘러간다. 그날의 빛, 바람의 움직임, 물의
그림자를 담고 싶다. 마음 속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구체적인 형상도, 언어도 아니다.
그 순간을 그 자체로 얼려서 간직할 수 있을까.


수분을 흡수하여 머금는 한지는 한 번 쌓은 색을 이내 깊은 곳으로 가져간다. 색이
충분히 나올 때까지 붓질을 겹친다. 수분이 마르고 난 뒤에는 색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마른 색 위에 다시 색을 겹치는 과정을 반복한다. 붓의 움직임에 따라 색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사진은 순간의 일부를 기억할 수 있다. 순간의 일부를 시각적으로 기록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단지 그림이 더 잘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림은 사진보다 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그림은 순간을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시각적인 기억이 아니다. 완전히 이질적인 형상 앞에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있다.


색이 많이 쌓인 곳은 불투명해진다. 색이 적게 쌓인 곳은 투명하다. 평면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붓이 멈추어도 평면의 시간은 흘러가고 형체는 변화한다. 우연과
필연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어떤 우연은 의도치 않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판단은 빨라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지휘자처럼, 시간을 따라
전진하는 평면을 통제해야 한다.


평면 위에 색이 쌓여 기억을 만든다. 반쯤 투명한 면과 색이 겹쳐진 면은 하나의
흔적처럼 남는다. 여러 겹의 색이 만들어내는 빛깔은 시간을 닮았다. 어두운 청색과
밝은 청색이 교차하며 덩어리를 만든다. 겹겹의 색이 쌓여 만든 덩어리에는 기억이
응집된다.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의 찰나에 흔들리는 감정이 담긴다.


물을 머금은 색은 빠르게 변한다. 흩어지고, 모이고, 흘러 내리고, 솟아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평면은 점차 형상이 된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평면의 연주를 이제 그만 멈출 것인지. 지금의 얼룩과 번짐, 발림을 영원하게 할
것인지. 자, 이제 순간을 얼리자.


그림은 그 형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쉽게 말하지 않는다. 누가에게는 뿌연 안개
속에서 답을 찾던 시간을 부르고, 누군가에게는 현기증 나게 눈부신 여름날의 빛을
기억하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눈앞으로 쏟아지던 물줄기가 되기도 한다. 멈춘 것은
물이기도 하지만, 바람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하고, 결국 시간이다.


그러나 결코 평면은 얼지 않는다. 종이는 숨을 쉬고 색은 시간을 담는다. 멈춘 그림이
받는 공기, 그것을 보는 이의 시간이 만나 다시 순간의 기억을 만든다.
다시, 순간은 이 그림을 보는 이의 몫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