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먼 Fathomless
2021. 1. 30 - 3. 3
작가 | 구나 이민지 이소의 차미혜
기획과 글 | 박지형공간 | 박준영기자재 | 올미디어디자인 | 프레스룸사진 | 고정균, 김신중(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제공)
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주관 |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관람시간 | 월-일 12 - 7PM, 설 당일 휴관
* 5인 이상 동시 단체입장 불가, 마스크 착용 및 출입기록부 작성 필수
* 본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의 지원을 통해 제작되었습니다
불가해한(fathomless) 질문과 선택적 사유들
박지형
[1]우리는 어둠이 어디로든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어둠을 밝음 뒤 반드시 도래할 운명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아니다. 이 비밀스러운 대상을 무턱대고 찬미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대신 그 속에 머무르며 발견하는 비언어적인 윤곽의 출몰, 어둠을 품을 때 비로소 확고해지는 명제로부터 어둠을 역으로 생각한다.
[2]어둠을 곁에 둔 이후 줄곧 머릿속을 맴돈 것은 신체가 어떤 물리적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특정한 시공과 육신의 테두리 안에 한정된 개인은 언제나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과거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적 인터페이스를 마련했고, 우주와 같은 미지의 영역을 인식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인류는 더 많은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몸과 정신의 일부는 언제든 여기를 떠나 탈물리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무형의 경계를 뛰어넘은 몸은 완전히 소멸되거나 새로운 지대에 안착하지 못한다. 모든 시간이 나와는 무관한 곳에서 존재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현재에는 더욱 그러하다. 유령처럼 희미해진 눈과 귀, 살갗은 여전히 깜깜한 궤도 어딘가를 서성이며 장애물과 부딪히고 예기치 못한 장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 헤맴 속에서 불현듯 기이한 감각의 파편이 튀어 오른다.
이 전시는 신체가 어둠의 알레고리를 감각하는 비선형적인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어둠은 변덕스럽고도 다의적인 것으로, 현실에서 어둠의 본질을 정의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실존하는 어둠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인 정의로 수렴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념의 불안정성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 가변적인 의미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 《멀고도 먼 Fathomless》은 어둠을 일종의 동시대적 오류나 미인식, 예기치 않은 충돌의 징후로서 간주하고 이로부터 야기되는 시차와 이탈, 만약의 사건과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네 명의 작가는 어둠의 관찰자 혹은 수행자가 된다. 그들은 불완전한 대화, 디지털 공간에서 드러나는 지리적인 균열, 수많은 색과 쌍을 이루는 어둠, 죽음 이후 계속되는 삶의 순환 고리를 언급한다. 이는 모두 어둠이 도래한 이후의 장면들이다. 즉 작품은 ‘암흑(darkness)’에 대한 사전적 의미보다 어둠으로부터 파생된 동사적 서술에 집중한다. 어둠은 일반적인 현실의 영역 밖의 감각들을 발화시키는 증폭기로, 상징적인 제약이면서도 무한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배경으로서 제시된다.
[3]구나는 지시성이 모호한 기호를 나열해 어둠을 품은 빛의 스펙트럼을 함축적인 장면으로 그린다. 그에게 낮잠, 계곡, 주름, 얼굴은 그림자와 함께 있어 더 희연한 것들이다. 얕고 넓은 접시에 담긴 물, 불투명한 오렌지색의 모과 껍질, 푸르스름한 핏줄이 드문드문 보이는 종아리는 〈낮잠그릇〉(2021)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낮잠은 빛을 담보로 한 죽음의 순간으로, 반짝이는 수면의 잔잔함과 움푹 팬 협곡을 동시에 연상케 한다. 뒤이어 긴 끈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볕을 마주한 한 쌍의 회화 작업과 마주친다. 눈을 감은 두 인물의 피부 위 크고 작은 굴곡에 어스름한 채도의 색들이 자리한다. 구김이 가득한 형상에 다가서면 식별하기 힘든 소리가 들리는데, 주름의 틈에서 새어 나온 울음은 마치 액체와 같이 흘러내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금새 증발한다. 흐릿한 빛과 심연의 지대에 있던 연약한 감각은 그의 작업 안에서 쓰고, 말하고, 빚어내는 오랜 공정을 거쳐 일시적으로 시연되는 극이 된다.
이민지는 이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가닿을 수 없는 사건을 부유하는 눈의 경험을 편지의 형식으로 재구성한〈터널링〉(2021)을 선보인다. K로부터 뒤늦게 수신한 메세지의 몇몇 링크는 이미 좌표값을 잃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구글 어스와 라이브 캠을 켜고 어쩌면 K가 봤을지도 모를 장면을 좇아간다. 화면 속 커서를 클릭하여 앞으로 나아가 보지만, 명확해지는 것은 손실된 정보의 공백과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과거의 잔상뿐이다. 실시간으로 접속하는 도시의 조망도 스크린의 장막에 가로막혀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엇갈린 시간대를 관통하는 이미지 속에서 실제와 허구의 경계는 무언가 쓰고 지워버린 유리의 표면처럼 얼룩진다. 작가는 디지털 환경이 지배적인 일상이 된 지금 선명한 진실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는 무수한 시각적 기호들의 교환과 연결로 이어짐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데이터의 실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어둠의 변두리에 잠적하다 먼 미래의 신호로 갑작스레 복귀한다.
이소의는 아득한 기억을 은유적인 매개물이나 제3자의 이야기를 빌어 다시 쓰기 한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할머니의 사진 없는 사진첩에 남아있던 작은 스티커들이 밤하늘의 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출발한〈탄생석〉(2021)은 할머니의 과거, 자신의 현재, 그리고 너무 멀어 만날 수 없는 시점의 대상을 광활한 우주에 존재하는 천체들의 순환으로 빗대어 본다. 별들은 궤를 같이 하는 다른 별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비대해지고 어느순간 폭발해 사라진다. 그러나 작은 죽음은 단절이기보다 곧 있을 충만한 시작을 추동하는 힘이므로, 다가올 시간의 가능성은 작가가 그려낸 은하의 명암 속에서 선연하다. 또한〈낭독하는 이름〉(2019)은 여행 중 마주치는 세 인물의 만남과 대화를 엮은 낭독 퍼포먼스를 담는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고립된 개체이기보다, 우주의 별들이 그러했듯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름과 프레임의 장벽을 넘나들며 파편화된 이미지를 중층적인 서사의 지속으로 엮어낸다.
차미혜는 완벽하게 상응하지 못하는 문장들을 질료로 삼고 이들 간의 입체적 배치를 통해 심리적 어둠이 작동하는 상호 관계의 지형도를 재현한다. 〈공중 조각〉(2021)의 한 부분인 세 편의 무빙 이미지는 조각난 신체의 부자연스러운 동작과 이름 모를 개체들이 여러 질감의 풍경 안으로 느리게 뒤섞이는 장면을 연쇄적으로 보여준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화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때로는 먼저 대답하거나 질문을 거두어들이기도 하며 불완전한 소통을 이어간다. 이어진 작은 방에서 끊어진 단어들은 실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분자들이 되어 청자의 촉각을 진동시킨다. 어둑한 공기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노이즈 틈새로 드문드문 나타난 목소리는 어느새 미인식의 구멍으로 숨어버린다. 대신 몸에 남는 것은 자국이 없는 소리의 흔적 혹은 곧 사라질 찰나의 기억이다. 이들은 모두 끝내 종결되지 않을 미완의 악보처럼 놓이며, 소리와 빛이 부재하는 지면의 여백들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기묘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4]전시는 상징적 의미의 어둠을 경험하는 주체의 내적 사유로부터 시작되는 이해의 틈이나 서술 불가능성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하는 태도와, 개인과 세계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시차와 거리감을 서사화하는 시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각기 다른 문학적 제스처를 취하는 네 작가가 어렴풋이 서로를 비추며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을 형용하는 수사들을 함께 구축해간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은 어둠의 근원을 필연적인 한계와 무한한 상상이라는 이종의 특성이 내재하는 상태로 바라보며, 그 둘 사이를 횡단하며 발견한 주관적 감각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 어쩌면 이 전시가 누군가에겐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 발견한 탐조등이 보내는 작은 신호와 같은 것이길 바래본다.
구나, 낮잠 그릇, 2021, 혼합매체, 가변크기
구나, 오렌지살구햇빛주름, 2021, 캔버스에 유채, 170 x 170 cm
구나, 화이트화이트블루스본, 2021, 캔버스에 유채, 210 x 180 cm
구나_설치전경
이민지, 8’17’’, 8’26’’, 2021, LED 패널, 철제 구조물, 119 x 173.4 x 46 cm
이민지, 터널링,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18'40''
이민지, CoordType 01, 2021, LED 패널, 121.5 x 86.7 cm
이민지, CoordType 02, 2021,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51.7 x 35.2 cm
이소의, 낭독하는 이름, 2019, 3 채널 비디오, 사운드, 8’48’’
이소의, 탄생석,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3’17’’
차미혜, 공중 조각, 2021, 3 채널 비디오 설치, 무음, 8’40’’, 12’30’’, 10’ (각)
차미혜, 공중조각, 2021, 4채널 사운드 설치, 16'50'', 21' (각)
불가해한(fathomless) 질문과 선택적 사유들
박지형
[1]
우리는 어둠이 어디로든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어둠을 밝음 뒤 반드시 도래할 운명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아니다. 이 비밀스러운 대상을 무턱대고 찬미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대신 그 속에 머무르며 발견하는 비언어적인 윤곽의 출몰, 어둠을 품을 때 비로소 확고해지는 명제로부터 어둠을 역으로 생각한다.
[2]
어둠을 곁에 둔 이후 줄곧 머릿속을 맴돈 것은 신체가 어떤 물리적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특정한 시공과 육신의 테두리 안에 한정된 개인은 언제나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과거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적 인터페이스를 마련했고, 우주와 같은 미지의 영역을 인식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인류는 더 많은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몸과 정신의 일부는 언제든 여기를 떠나 탈물리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무형의 경계를 뛰어넘은 몸은 완전히 소멸되거나 새로운 지대에 안착하지 못한다. 모든 시간이 나와는 무관한 곳에서 존재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현재에는 더욱 그러하다. 유령처럼 희미해진 눈과 귀, 살갗은 여전히 깜깜한 궤도 어딘가를 서성이며 장애물과 부딪히고 예기치 못한 장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 헤맴 속에서 불현듯 기이한 감각의 파편이 튀어 오른다.
이 전시는 신체가 어둠의 알레고리를 감각하는 비선형적인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어둠은 변덕스럽고도 다의적인 것으로, 현실에서 어둠의 본질을 정의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실존하는 어둠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인 정의로 수렴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념의 불안정성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 가변적인 의미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 《멀고도 먼 Fathomless》은 어둠을 일종의 동시대적 오류나 미인식, 예기치 않은 충돌의 징후로서 간주하고 이로부터 야기되는 시차와 이탈, 만약의 사건과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네 명의 작가는 어둠의 관찰자 혹은 수행자가 된다. 그들은 불완전한 대화, 디지털 공간에서 드러나는 지리적인 균열, 수많은 색과 쌍을 이루는 어둠, 죽음 이후 계속되는 삶의 순환 고리를 언급한다. 이는 모두 어둠이 도래한 이후의 장면들이다. 즉 작품은 ‘암흑(darkness)’에 대한 사전적 의미보다 어둠으로부터 파생된 동사적 서술에 집중한다. 어둠은 일반적인 현실의 영역 밖의 감각들을 발화시키는 증폭기로, 상징적인 제약이면서도 무한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배경으로서 제시된다.
[3]
구나는 지시성이 모호한 기호를 나열해 어둠을 품은 빛의 스펙트럼을 함축적인 장면으로 그린다. 그에게 낮잠, 계곡, 주름, 얼굴은 그림자와 함께 있어 더 희연한 것들이다. 얕고 넓은 접시에 담긴 물, 불투명한 오렌지색의 모과 껍질, 푸르스름한 핏줄이 드문드문 보이는 종아리는 〈낮잠그릇〉(2021)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낮잠은 빛을 담보로 한 죽음의 순간으로, 반짝이는 수면의 잔잔함과 움푹 팬 협곡을 동시에 연상케 한다. 뒤이어 긴 끈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볕을 마주한 한 쌍의 회화 작업과 마주친다. 눈을 감은 두 인물의 피부 위 크고 작은 굴곡에 어스름한 채도의 색들이 자리한다. 구김이 가득한 형상에 다가서면 식별하기 힘든 소리가 들리는데, 주름의 틈에서 새어 나온 울음은 마치 액체와 같이 흘러내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금새 증발한다. 흐릿한 빛과 심연의 지대에 있던 연약한 감각은 그의 작업 안에서 쓰고, 말하고, 빚어내는 오랜 공정을 거쳐 일시적으로 시연되는 극이 된다.
이민지는 이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가닿을 수 없는 사건을 부유하는 눈의 경험을 편지의 형식으로 재구성한〈터널링〉(2021)을 선보인다. K로부터 뒤늦게 수신한 메세지의 몇몇 링크는 이미 좌표값을 잃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구글 어스와 라이브 캠을 켜고 어쩌면 K가 봤을지도 모를 장면을 좇아간다. 화면 속 커서를 클릭하여 앞으로 나아가 보지만, 명확해지는 것은 손실된 정보의 공백과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과거의 잔상뿐이다. 실시간으로 접속하는 도시의 조망도 스크린의 장막에 가로막혀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엇갈린 시간대를 관통하는 이미지 속에서 실제와 허구의 경계는 무언가 쓰고 지워버린 유리의 표면처럼 얼룩진다. 작가는 디지털 환경이 지배적인 일상이 된 지금 선명한 진실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는 무수한 시각적 기호들의 교환과 연결로 이어짐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데이터의 실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어둠의 변두리에 잠적하다 먼 미래의 신호로 갑작스레 복귀한다.
이소의는 아득한 기억을 은유적인 매개물이나 제3자의 이야기를 빌어 다시 쓰기 한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할머니의 사진 없는 사진첩에 남아있던 작은 스티커들이 밤하늘의 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출발한〈탄생석〉(2021)은 할머니의 과거, 자신의 현재, 그리고 너무 멀어 만날 수 없는 시점의 대상을 광활한 우주에 존재하는 천체들의 순환으로 빗대어 본다. 별들은 궤를 같이 하는 다른 별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비대해지고 어느순간 폭발해 사라진다. 그러나 작은 죽음은 단절이기보다 곧 있을 충만한 시작을 추동하는 힘이므로, 다가올 시간의 가능성은 작가가 그려낸 은하의 명암 속에서 선연하다. 또한〈낭독하는 이름〉(2019)은 여행 중 마주치는 세 인물의 만남과 대화를 엮은 낭독 퍼포먼스를 담는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고립된 개체이기보다, 우주의 별들이 그러했듯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름과 프레임의 장벽을 넘나들며 파편화된 이미지를 중층적인 서사의 지속으로 엮어낸다.
차미혜는 완벽하게 상응하지 못하는 문장들을 질료로 삼고 이들 간의 입체적 배치를 통해 심리적 어둠이 작동하는 상호 관계의 지형도를 재현한다. 〈공중 조각〉(2021)의 한 부분인 세 편의 무빙 이미지는 조각난 신체의 부자연스러운 동작과 이름 모를 개체들이 여러 질감의 풍경 안으로 느리게 뒤섞이는 장면을 연쇄적으로 보여준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화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때로는 먼저 대답하거나 질문을 거두어들이기도 하며 불완전한 소통을 이어간다. 이어진 작은 방에서 끊어진 단어들은 실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분자들이 되어 청자의 촉각을 진동시킨다. 어둑한 공기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노이즈 틈새로 드문드문 나타난 목소리는 어느새 미인식의 구멍으로 숨어버린다. 대신 몸에 남는 것은 자국이 없는 소리의 흔적 혹은 곧 사라질 찰나의 기억이다. 이들은 모두 끝내 종결되지 않을 미완의 악보처럼 놓이며, 소리와 빛이 부재하는 지면의 여백들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기묘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4]
전시는 상징적 의미의 어둠을 경험하는 주체의 내적 사유로부터 시작되는 이해의 틈이나 서술 불가능성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하는 태도와, 개인과 세계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시차와 거리감을 서사화하는 시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각기 다른 문학적 제스처를 취하는 네 작가가 어렴풋이 서로를 비추며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을 형용하는 수사들을 함께 구축해간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은 어둠의 근원을 필연적인 한계와 무한한 상상이라는 이종의 특성이 내재하는 상태로 바라보며, 그 둘 사이를 횡단하며 발견한 주관적 감각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 어쩌면 이 전시가 누군가에겐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 발견한 탐조등이 보내는 작은 신호와 같은 것이길 바래본다.
구나, 낮잠 그릇, 2021, 혼합매체, 가변크기 |
구나, 오렌지살구햇빛주름, 2021, 캔버스에 유채, 170 x 170 cm |
구나, 화이트화이트블루스본, 2021, 캔버스에 유채, 210 x 180 cm |
구나_설치전경 |
이민지, 8’17’’, 8’26’’, 2021, LED 패널, 철제 구조물, 119 x 173.4 x 46 cm |
이민지, 터널링,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18'40'' |
이민지, CoordType 01, 2021, LED 패널, 121.5 x 86.7 cm |
이민지, CoordType 02, 2021,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51.7 x 35.2 cm |
이소의, 낭독하는 이름, 2019, 3 채널 비디오, 사운드, 8’48’’ |
이소의, 탄생석,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3’17’’ |
차미혜, 공중 조각, 2021, 3 채널 비디오 설치, 무음, 8’40’’, 12’30’’, 10’ (각) |
차미혜, 공중조각, 2021, 4채널 사운드 설치, 16'50'', 21' (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