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그라운드  Body Ground



2020. 12. 28 - 2021. 1. 22

조재영 개인전




관람시간 | PM 12 - 7, 휴관없음
장소 | 온수공간 1F 
후원 | 서울문화재단, 서울특별시
시공 | 홍민희
디자인 | 이동영


* 별도의 오프닝 리셉션은 진행하지 않습니다
* 5인 이상 동시 단체입장 불가, 마스크 착용 및 출입기록부 작성 필수






폴리곤 다면체로부터- 증식과 변이, 구속과 통제 사이에서

남웅

1
폴리곤(polygon)으로 짜인 다면체(polyhedron) 오브제로부터 어떤 사물을 참조했는지 떠올리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지표이자 참조대상으로서 사물은 수치화되기에, (‘기하학적 형태로 최종 작업이 나온다는 것은 대상을 숫자로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 거꾸로 사물은 수치화되고 변형되기 위해 참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상의 골격과 형태를 살피고 이를 다시 재조립하는 공정은 기능을 삭제하고 누락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여 조재영의 작업은 그저 쪼개고 다시 붙이는데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한 오브제를 다시 잇고 쪼개진 결과물을 거슬러 읽어내는 독해까지 포함한다. 작업은 제작과 비평의 과정을 반복하는 시간 위에 놓인다.

작가는 각 피스(piece)의 길이와 각도를 정해 부분의 도면을 만들고 폴리곤 다면체를 조립하되, 완결된 스케치는 미리 그려놓지 않으며 형태를 짜나가는 상황마다 형상의 궤도를 변주하며 피스를 달리 붙인다. 얼핏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사용해 도안했으리라 추측할 법한 작업은 예상과 달리 수공의 반복적인 노동에 상당부분 기초한다. 작가는 윤곽에 맞춰 카드보드를 쪼개 면으로 분할하여 추상화된 형상을 만들고, 더러는 그 위에 접착셀로판지를 붙여 색을 입힌다. 해체와 소거를 통해 형상을 구축하는 작업에는 틈 없는 계산이 필수로 전제되며 그 과정에 즉흥적으로 변주를 떠올려 이행하는 식이다. 계속되는 계산속에 붙여나간 오브제는 증식하고 변이한다. 주관성을 펼쳐내기 위해 일련의 노고를 감수하는 것인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집도 아래 수학적 계수로 해체와 접합의 변수를 포섭한다는 점이다.

폴리곤 단위로 사물과 공간을 번역하고 쪼개어 다시 이어붙이는 작업은 참조대상으로서 사물과 풍경 전반을 피스들의 접합으로 수렴하는 규칙을 수립한다. 사물과 세계의 개별적인 구체성은 수치화된 카드보드의 조각들로, 폴리곤 구조로 균질하게 쪼개지고 재조합된다. 이질적인 대상들을 동일한 구조와 질료로 수렴하여 특정 소재와 모듈로 추상화하는 작업은 흡사 교환가치로 치환하는 본위화폐의 프로세스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평면의 각진 카드보드 파편들은 최소단위로 기능한다. 각 조각들이 맞물려 형태의 복잡성과 볼륨을 가감하며 참조 형상을 왜곡하고 구축한다. 특정한 면들로 재조합된 오브제들은 피스의 수치 아래 독립적으로 변용하거나 다른 계량된 사물들과 연접할 수 있다. 그렇게 윤곽을 그리고 다면체로 분할하는 과정은 사물에서 신체로, 가구로, 건축구조로, 경관으로 대상의 문법을 키워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사후적 추론일 뿐 기실 사물과 풍경, 신체의 구분은 분명하지 않다. 외려 대상을 쪼개고 변형시켜 축조하는 과정에 사물은 공간에 연동하며 전시장의 건축적 구조에 비평적으로 호응한다. 
 
해체된 상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참조대상으로서 사물을 계측하고 그것의 기능과 구조를, 그것이 작동하는 맥락과 위계를 거슬러 읽는다. 절합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사물의 지배적 질서를 비판적으로 읽는 전초작업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해당 사물이 어떤 기능과 생산과정 아래 만들어지는지, 건물의 구조가 어떤 동선을 유도하는지, 그것이 어떤 질서를 고착하고 있는가를 따져 물으며 추적의 범주를 확대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대상이 보존하고 강제해온 질서가 누락하고 배제해온 것들을 살핀다. 

하여 그의 방법론은 사물과 공간의 질서를 번역함과 동시에 그것이 우연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가변적임을 폭로한다. 카드보드 다면체로 여과된 산출물은 기존의 사물과 유비해낼 수 없는 구조의 형상으로 짜인다. <몬스터>(2016)와 <앨리스의 방>(2017)이라 명명하는 작법은 이를 염두에 둔 결과물이다. 산출물은 사물을 쪼개고 부숴냄으로써 질서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사물의 임계를 확장하는 작업은 동시에 지배적 규준의 틈새와 그 외부를 향한다. 하지만 틈사이로 출몰하는 형상 역시 계량화된 다면체 형태로 부서지고 쪼개진 채 빈틈없이 카드보드 폴리곤의 포섭을 피할 수 없다. 사물의 질서를 거스르는 비판적 재현 또한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질서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또한 폭력적 재현의 시스템에 맞선 재현의 체제 역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시사한다. 설령 그것이 폭력의 비평적 전유라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오브제는 제 조형 질서를 통해 사물을 번역하고 변형시키지만, 최종적으로는 질서 자체로부터 탈주하기보다 사물의 구성 질서 자체를 비평적인 조형 문법으로 재조형하는데 집중한다. 설령 그것이 절합되고 변형된 결과물일지라도, 질서로부터 온전히 독립할 수 없는 사물은 왜상으로서 질서를, 또는 메타 질서를 제안하며 형상의 임계치를 계속해서 높여간다. 

그렇다면 조재영 작가의 방법론은 지배와 피지배, 규칙과 일탈의 이분법을 절개하며 비평적으로 재구축하기 위해 고안된 재현적 질서로 접근할 수 있을까. 잘리고 접힌 결과물로서 오브제는 변형되고 뒤틀린 사물의 흔적을 가진 이형태의 윤곽을 부여받는다. 위계와 기능을 살펴내면서 비우는 작업은, 동시에 속을 비우며 카드보드로 짜맞추는 공정처럼 보인다. 마치 ‘부분과 전체가 상호 반영하는 만다라처럼 부재하는 중심을 향해 겹쳐져 있는 시간과 장소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 계량화된 사물의 지표는 유진상의 표현처럼 ‘껍질’만 남은 상태다. 이른바 조재영은 해체적 사물과 공간의 껍질로서 골격을 조형하는 기술을 방법론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를 그저 표면만 박피하듯, 또는 시간과 사물의 기능이 소거되었다고 읽는 것은 온전한 독법일 수 없다. 공간의 이상적 질서를 소거하고, 제 구조를 쪼개고 해체하며 뒤집어낸 헤테로토피아적 형상, 그것의 시적 표현이 갖는 존재적 무게와 효과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동과 기술을 거치며 어떤 질료로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내야 한다.

작업은 수치화된 카드보드 질서에 여과된 세계, 또는 세계관의 변형 자체를 가리킨다. 분할된 면들이 사물의 껍질이라 할지라도 껍질들은 각 면마다 길이와 각도를 계산하고, 재단을 위한 훈련을 바탕으로 오차를 최소화한 결과물이다. 우연적 형상처럼 보이지만(더불어 공정상 우연성을 굳이 부정하지 않지만) 사물의 질서를 간파하고 탈구해내는 작가의 감각적인 판단과 정밀한 계산에 바탕 하는 절삭과 접착이 따른다. 유기적 신체의 구조를 소거하는 껍질의 작업은 많은 손길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껍질과 피하 조직을 분리하는 구조 자체를 해체함과 동시에 껍질로서 골격과 살을 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해체적 껍질의 질서는 사물과 좌대의 위계를, 조형의 수직적 위계를 뒤섞는가 하면, 껍질들을 중첩하고 다른 껍질을 붙여내면서 동세의 흔적을 증식하거나 지우는 과정을 거친다. 껍질의 문법으로 사물을 해체하고 동시에 명명하는 작업은 사물의 기능과 형태의 프레임을 비워냄과 동시에 비워짐 자체로서 오브제를 제시한다. 

여기에 카드보드라는 단단하게 보임에도 비교적 쉽게 손상될 수 있는 질료적 특성은 껍질의 물성을 갖는 사물-풍경을 강력하게 떠올리게 한다. 보존에 취약한 질료 특성상 오브제는 쉽게 물신화되기 어렵다. 설령 보존과 유지를 위해 습도를 조절하고 바니쉬 코팅을 하는 등의 과정이 덧붙여지더라도 3) 한시적으로 고정되는 전시의 시간보다 제작되는 시간과 전시 이후 작품이 유통되거나 보관되는 중에 손상되고 때로 보수되거나 폐기되는 시간이 오브제의 시간성을 지배한다. 그것은 보존보다 변형을, 전시기간 한시적으로 보존되는 고정의 형태보다는 전후 제작과 보존 속에 구성되고 변이하며 끝내는 낡고 쇠락하는 반복적인 패턴에 지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
《Body ground》라는 표제가 가리키듯 2021년 온수공간에서 열린 조재영의 전시는 작업의 소재를 신체로 옮겨냈음을 예상케 한다. 여기에는 그동안 사물과 공간을 계량해온 주체가 계량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 양식을 분할해왔음을 암시한다. 인터뷰에 언급하듯 사물을 다면체로 번역해내는 작업은 사물의 질서를 독파하는 작가의 의식적 관점을 스스로 응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은 폴리곤으로 쪼개어지지만, 이를 휴먼스케일에 연동하는 신체 또한 대상화된다.

신체를 소재삼았다고 하지만 정작 관객은 신체의 온전한 형태를 가늠하기는커녕 어떤 신체 부위인지 유추할 수 없으며 그것이 인간의 형태인지, 생명체이기는 한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가공된 신체는 파괴의 프로세스를 거친다. 계량적 수치에 인체를 유사하게 옮겨내기보다 신체를 대상화하고 비인격적 사물로 가공했다는 표현이 좀 더 근접할까. 균질화와 수치화를 통해 쪼개지고 변형을 거친 오브제는 인체의 형상적 프레임과 안팎의 경계에 종속하기보다 차라리 껍데기의 질서에 투과된다. 그것은 내장이 골격을 갖거나 수족이 잘리거나 엉뚱한 부위에 이접한 듯 보이는 추상화된 형상을 갖춘다. 가지와 뿌리가 잘린 줄기 같은 형상이 매달린 가운데 돌기와 가시들이 한데 엮인 조합은 작가의 표현처럼 ‘기존의 인식은 무력해졌으나 새로운 인식은 확고해지지 않은’ 과정으로서 변형된 구체적 형상보다는 변형 자체의 단면에 가깝다. 역시나 여기에는 온전한 도면이 주어지지 않은 채 부분의 계량화된 피스들이 서로 간 유사성을 확보하며 최소한의 동형성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형상적 변이가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지점은 그것이 신체로부터 파생되었음을 겨우 입증한다. 

한편 골격으로서 금속 거치대는 오브제를 언제든지 떼어내 조립할 수 있도록 임의적으로 정리해놓은 프라모델 키트 내지 신체 부품을 안치해놓은 새장 등을 연상시킨다. 거치대와 오브제들은 자율성을 갖지만 일정 부분은 서로 간 종속적으로 엮여 있다. 오브제들은 올곧이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뼈대에 매달리고 끼워짐으로써 바로 서거나 제 위치를 차지한다. 변이체를 지지하는 거치대는 유닛의 독립적인 형상을 보장하지만, 보장함으로써 구속하는 기능 또한 갖는다. 요컨대 사물을 계측하고 다면체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거치대는 건축과 사물, 신체를 배치하고 지지하는 관념적 골격을 암시한다. 가령 좌대와 오브제는 각기 뼈대와 돌기, 촉수와 내장을 구성하며 붉은 계열의 셀로판 접착지로 수혈된 신체-사물의 건축적 오브제로서 혼성적 형상으로 거듭한다. 신체 프레임을 탈구하면서도 신체의 구심력에서 아주 분리되지는 않은 오브제 군락은 안정적인 유기체보다 일개 부품들로 쪼개어진 껍질로서 신체, 보랏빛과 핑크빛의 혈기가 도드라지는 신체, 하지만 판단을 유예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가변성을 본질로 삼는다. 

폴리곤 오브제와 거치대 사이 원심력과 구심력을 보이는 긴장은 구조물의 부분을 차지하는 거울을 통해 집약된다. 골격에 붙은 거울은 하나로 부착된 대상과 거치대의 연장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끝없이 반사하며 골격의 내부를 응시한다. 제 형태를 인지하고 완결된 몸을 부여잡지만 오브제에 맞붙어 있는 거울은 ‘장님 코끼리’와 같은 형상으로 온전한 모습을 담지 못한다. 여기에 상을 왜곡된 형태로 반사하는 거울렌즈는 손상된 시각이 형상의 온전한 모습을 포섭할 수 없다는 불구의 신체를 위계화하기보다 온전한 코끼리의 형태가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회의에 부치는 시각적 반사와 해체적 물음표를 취한다. 상을 왜곡하는 거울은 다시금 산개하는 빛에 다면체 폴리곤의 형태로 쪼개지는 가공된 형상의 질서를 상기시키는가 하면, 비정합적으로 짜인 합판 벽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의 건축적 공간으로 투사하여 예의 상호 종속적 해체의 조형성을 확장해나가는 상상을 증식케 한다. 

그런 점에 신체가 규격을 탈구하고 변이하는 하나의 장(ground)으로서 카드보드 작업들은 동시에 탈구된 신체가 어떻게 통제되고 규격화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을 안는다. 수학적 계측을 다변화함으로써 무한의 집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껍데기가 품고 있는 공백의 존재론은, 일견 수학을 존재론의 장치로 삼아 무한성을 이끌어내는 알랭 바디우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무한의 공백을 표시하는 카드보드의 증식과 분열은 균질화된 단위로 변형과 해체 (불)가능성까지 통제하는 자본의 공리주의적 체제 또한 함의한다. 이는 한편으로 부계 기술의 문법에 착취되고 대상화되는 여성의 몸이 기술을 전유함으로써 생산적인 결합들의 조건으로서 인간-기계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며 이상한 연대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페미니즘의 프로파간다를 소환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미래적 청사진으로서 신화적 시나리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숙려하는 할 포스터의 머뭇거림 역시 상기시켜준다. 4)

작가는 번역과 가공을 통해 신체 질서를 탈주하는 변형 가능성을 탐구하지만, 그가 견지하는 몸의 존재적 무게와 구조는 껍데기로 필터링 된다. 납작해진 존재로의 전회는 조형적 형상의 번역 가능성을 산출하지만, 그것은 조형적 프릭쇼처럼 다시 묶여 전시를 위한 도구로 속박될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가 끝내 놓지 않으려는 것은 예의 변수와 우연성으로부터, 속박과 대상화로부터 확보해온 주도권이 아닐까.  

대상화된 신체와 골격을 가진 오브제는 부서졌지만 다시 접혀나가고 있으며, 완결성을 초과하거나 결핍하는 중에도 거치대와 긴장과 균형을 유지한다. 둘은 상호 간 기대고 종속되어 있지만 어쩌면 밀착하여 의존하는 상황에도 서로를 반사하며 적대하고 있는 모습을 취한다. 거치대가 오브제들을 분류해서 가두고 포박하는 중에도 각각의 오브제들은 폴리곤의 질서 속에 쪼개지며 증식하고 변이를 지속한다. 반복적으로 절단되고 분할되는 신체들이 자신을 자르고 통제하는 장치로서 거치대와 상호 적대 속에 공존해내는 풍경은 형상의 해체를, 구축 가능성과 그 질서를 그려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형상들은 탈주체적 속박과 신체를 재배치하는 수행을 바탕으로 존재의 질서를 재배치해나가는 점에 BDSM(Bondage(구속)/Discipline(훈육), Dominance(지배)/Submission(굴복), Sadism(가학)/Masochism(피학)을 비롯한 다양한 성적 실천들의 총칭)의 질서가 조각적 재현으로 치환되는 지점에 공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수학적 폴리곤의 계측을 작업의 질서로 삼아 신체의 탈구를 종속시키고 거치대에 속박되면서도 탈형상을 끝없이 수행해내는 작가의 방법론에 닿는다. 그것은 기능도 의미도 부정한 채 무의미성을 향하지만, 무의미성을 향한 조형적 실천은 수의 질서 아래 수다한 해체의 노동을 바탕 삼는다. 

하여 우리는 작가에게 다음의 비평적 질문과 과제를 남길 수 있다. 수작업의 공정으로 폴리곤을 짜내는 방식으로부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통해 증식과 변이의 속도를 높인다면 작가는 어떤 조형적 협상을 확보하고 선점해나가야 할까. 휴먼 스케일의 게슈탈트적 임계를 초과하는 프로세스는 작가의 재현적 주도권을 압도할 것인가. 가령 작가의 즉흥적 판단과 AI를 통해 증식할 수 있는 가능성 사이에는 어떤 변별성이 있을까. 이는 단지 장치 선택의 문제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 카드보드지의 질료적 가변성과 보존의 취약성은 보완될 수 없을까. 물론 그것은 질료 차원의 과제 너머 끝없이 변용되어온 작업을 박제하고 물신화하는- 어쩌면 작가가 경계해온- 효과에 대해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물신으로서 오브제를 끌어안으면서도 비평적으로 돌파할 방법은 어떻게 고안될 수 있을까. 짓궂은 질문들은 작가의 방법론을 다시 쪼개고 추상화하여 배치할 것을 과제로 던진다. 카드보드 조각들의 절합이라는 공정은 이제 오브제를, 작가의 방법론을 향한다.

사물과 공간의 질서를 계량화하고 이를 틈 없이 어긋 내며 붙여나가는 작업은 작가의 주체적인 판단과 수행에 의거해서 진행되었다. 그는 면들의 집적으로서 카드보드 형상과 골격으로서 거치대들을 분리시키거나 이어나가고 전형적인 구분과 위계를 절개해왔다. 또한 사물의 질서가 누락시킨 장면과 이름과 순간들을 포착해왔다. 그간 작가가 노동집약적 시간을 투여하면서도 보존에 취약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작업의 실권을 쥐어왔다면, 이제는 조형적 방법론을 업데이트 해나가는 과정에 주도권 자체를 협상의 긴장과 불화 위에 올리게 되는 지점들이 기다리고 있어 보인다. 작가가 지속을 확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적 책략을, 방법론적 전환을 가져야 할까. 물신과 균질화의 비평적 갱신이라는 과제가 날선 카드보드 폴리곤 다면체에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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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정윤, 「평등하고 자율적인 ‘상태’의 구현」, 조재영 작가 인터뷰 중. 링크: http://www.jaiyoungcho.com/525725122150980kr.html

2) 유진상, 「겹쳐진 시간의 장소들」, 《낙원 아래에서》(2017) 평문 중. 해당 텍스트는 조재영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링크: http://www.jaiyoungcho.com/509765165249345kr.html

3) 최정윤, 위의 인터뷰 중.

4) 할 포스터, 이영욱 외 옮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p.327-32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