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지 않은 땅을 딛고 서기




2020. 11. 5 – 11. 18


김정인 개인전



장소 | 온수공간 
후원 | 서울문화재단, 서울특별시
관람시간 | PM 12 - 7, 휴관없음
디자인 | 모눈스튜디오
촬영 | 온아트스튜디오
번역 | 강영주
글 | 황윤중

무르고 위태로운 세계에서도

잔해만 남아 거리에 버려진 거울, 깨진 유리잔, 금이 간 창문, 오랜 시간 누수로 멍든 것처럼 얼룩덜룩한 천장. 성치 않은 사물들의 위태로운 몸을 바라본다. 이 장면들의 제목에서 유추하자면 사물들에게 어떤 ‘급류’가 들이친 것 같다. 화면에서 급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그림은 급류라고 부르는 어떤 힘의 운동이 작용한 결과들을 보여준다. 그 힘에 의해 사물들은 손상되고 버려지고 방치된다.

이 급류는 인간에게도 작용한다. 인물들은 나무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숨은 남자>(2020)), 무거운 물속에 잠겨 있고(<잠식된 남자>(2020)), 벽면 속에 숨은 그림처럼 희미하게 존재한다(<다양한 저항>(2019)). 때로 급류는 강한 바람의 형태로 불어온다(<탈색되는 남자>(2019)). 화면에 몰아치는 습한 바람에 누워있는 인물의 흉부와 복부는 휘저어지고 머리는 유체이탈이라도 하듯 휩쓸려 나간다. 바람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작은 기둥을 붙잡고 있는 손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미지의 급류는 풍경에도 작용한다. 풍경은 벽지 마냥 붙였다 떼어낼 수 있는 불안정한 지위를 보이곤 한다. 풍경의 면들이 낡은 벽지나 도배지처럼 쉬이 찢어지고 해지며 그 뒤에는 또 다른 풍경면이 존재한다. 이때 화면은 여러 겹의 벽지가 붙어 있는 벽면처럼 기능한다(<우리를 지켜줄 나무 강아지 4>(2019)). 풍경은 얇은 천이나 벽지 한 장의 두께를 드러내며 납작해지고 가벼워진다. 하늘인 줄 알았는데 헤진 모서리를 들추어보니 뒷면에 돌담이다(<서로를 의존하는 대상>(2019)). 언뜻 3차원의 공간성을 묘사한 듯 보이던 화면은 2차원 평면들로 축소된다. 풍경은 위태롭다. 풍경이 낡은 벽지처럼 찢어지니 그 안에 위치한 존재들의 지위 역시 위태롭다.

화면 전반에 배인 습기로 본래의 성질을 잃고 물러진 몸들은 한 번 더 위태롭다. 날카롭지도 베이지도 않을 듯 무른 유리는 간신히 반사의 기능만 하며, 젖은 불은 무얼 태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른 천정은 언제 머리 위로 녹아내릴지 모른다. 질척이는 땅 위에 다리는 굳건히 서지 못 한다. 무른 공기가 스민 무른 살과 풍경은 한 겹 두 겹 본래의 색을 잃고 어두워진다. 급류에 젖은 세계는 흐리고 무르며 불안정하다. 

이 세계에서 ‘풍경과 사물과 인간’은 모두 불안한 운명 공동체의 일원들이다. 다 같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하지만 그의 화면은 오직 장례식만이 일어나는 공간이 아니다. 홀로 버티기 어려운 그들은 연대한다. 

<서로를 붙잡는 이미지>(2020)는 급류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버티려는 몸짓들의 집합을 보여준다. 질은 땅에서 무언가를 끌고 나가려는 자세의 인물, 물컹한 뻘 위에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와 몸이 잠긴 채 표정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 인물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애써 버티고 있는 동병상련의 신체들을 ‘벽지를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한 화면에 모으며 연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때론 서로의 몸을 ‘접붙이는 방식’으로 연대한다. 인물의 머리와 나뭇가지가 한 몸으로 이어 붙고, 하나의 얼굴 곁에 또 다른 얼굴이 숨은 그림처럼 결합된다(<우리를 지켜줄 나무 강아지 2>(2019), <우리를 지켜줄 나무 강아지 4>). 또는 한 인물의 등에서 유령처럼 희미하게 솟아난 팔이 트럭 안 이삿짐을 옮기는 이에게 우산을 씌워준다(<이주 현장>(2019)).
<풍경과 남녀>(2019)에서는 건물 벽면과 나무와 인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치듯 운동하는 붓질로 각 신체들 사이에 서로를 붙잡는 마찰력을 발생시키면서 회화의 공간에서 유효한 상호의존적 건축술을 수행한다. 
풍경과 사람과 사물은 비록 견고하지 못한 임시적 형태로 나마 서로를 붙잡는 공동의 몸을 구성해 급류를 버텨낼 수 있는 관계의 힘을 강화시킨다.

버티기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들도 일어난다.
급류의 정체를 탐사하기 위한 길을 나서려는 듯 강한 바람에 하늘의 공기와 지상의 식물들이 요동치는 어둠 속에서도 차분한 태도로 채비하고(<채비하는 남자>(2020)), 보이지 않는 물속의 운동을 읽어내 듯 장막 안으로 낚싯대를 넣어보고(<습기가 가득한 곳>(2020)), 수많은 거울들로 가로막힌 길을 뚫고 나무를 향해 다가가려 시도한다(<나무에게 가는 길>(2020)).
도시 스스로 몰아낸 자연의 일부이지만 조경을 위해 다시 소환하여 이용하는 존재가 바로 나무이다. <나무에게 가는 길>과 <거울이 동반한 혼란(2020)>에 등장하는 원형 거울들은 이 나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두 그림의 거울 앞에 위치한 인물은 분명 야외에 위치함에도 거울은 도시 내부에 조성된 실내 공간들을 비춘다. 인물은 경계가 불명확한 곳, 실내이자 실외인 공간에 자리한다. 이제 여기가 야외인지 실내인지 알 수 없다. 거울 속 이미지는 공간에 대한 감각을 교란한다. 더불어 여러 단면들로 조각나고 금이 간 하늘은 혼란감을 증폭시킨다.
인물은 교란의 주체인 거울을 뚫고 나아가려 시도한다(<나무에게 가는 길>). 하지만 질은 땅 위로 틈 없이 빼곡히 늘어선 거울의 몸체와 거울 안에 비친 이미지들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나무에게 가는 길을 이중으로 가로막는다. 그의 몸짓에 틈을 내주거나 깨지거나 제거되는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거울 방패는 견고하다.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장면들에서 인물들이 행하는 나름의 탐사가 성공한 결과를 목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장면들은 가망 없음으로 치닫지 않는다. 자기 파괴나 대상 파괴로 치닫지도 않는다. 그들은 때론 우직하게 버티고, 때론 소심하게 저항하고, 때론 귀엽게 활기를 이어나가며 동병상련의 존재들과 연대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비록 처지는 위태로우나 활기가 만만치 않다. 이 활기는 무른 세계의 습기에 상하지 않고 오히려 점토를 다지듯 단단하게 다져진 그의 나무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습기를 소화하고 재신체화 해낸다(<나와 같은 나무>(2019)). 그의 무르지만 굳건한 나무는 쉬이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몸에는 쉬이 물러지지 않을 생명력과 활기가 작용하고 있다.


글 황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