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아



2020. 8. 12 – 8. 26
 


곽인탄   박서우   정중원   한성우   황수연



기획 | 박시내
장소 | 온수공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PM 1 - 7, 휴관없음
디자인 | 이재환


                    
에피파니아 Epiphania

전시는 몇 가지의 간단한 미술사적 참조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에피파니는 기독교 서사에서 동방박사들이 마구간의 아기 예수, 즉 메시아를 만나는 순간을 뜻한다. 그래서 그 단어는 메시아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냄을 뜻하는 동시에, 동방박사의 발견과 깨달음이라는 의미 또한 내포한다. 드러냄과 발견. 두 순간이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한다는 것은 찰나이며 동시에 지연되는, 어찌 보면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는 과도의 시간과 몸에 대한 것이다.

다음으로, 에드가 드가가 제작한 뒷짐을 진 발레리나 조각을 떠올려보자. 소녀의 머리는 실제 가발로, 옷은 실제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소녀의 몸은 밀랍으로 이루어져 있다. 드가는 왜 그녀에게 실제 머리칼을 심고 실제 옷을 입혔는가? 왜 당시의 주재료였던 청동이 아닌 밀랍으로 소녀의 피부를 만들었는가? 역사와 주류를 역행하는 물성의 선택은 조각에 어떤 숨결을 불어 넣고 있는가?1

밀랍은 견고하며, 쉽게 수정이 가능하다. 밀랍에는 물이 침투할 수 없으나 동시에 쉽게 용해된다. 밀랍은 불투명한 동시에 투명하며, 일시적인 동시에 풍부한 텍스처를 담지한다. 그러니까 밀랍은 자신의 불안정함으로, 불안정함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인 동시에 형상이 된다. 드가는 살결을 만들기 위해 따뜻하고 요동치는 재료를 사용했을 것이다. 소녀의 피부는 그것이 밀랍이기 때문에 비로소 피부가 되었다. 그가 밀랍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가지지도, 실제 옷을 입지도, 그렇게 삐딱하게 서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시는 작업의 마띠에르에 다가서는 경험을 제안하고자 한다. 프랑스어로 마띠에르(matière) 는 재료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재료로 이루어진 물질의 질감이나 두께를 의미한다. 작품이 되기 이전인 날 것의 상태와, 그 위에 새로운 질감과 형상을 얻게 된 상태는, 묘하게도 하나로 겹쳐진다.

우리는 물질과 형상을 나누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하는, 미술사의 간격들을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왔다. 물질이 만들어내는 환영(수많은 르네상스 회화들)에 자극받거나, 새로운 물질의 발명이나(비디오 아트, 디지털 아트) 재료 자체에 (레디메이드) 영감을 받았다. 언어의 역사는 더 적극적으로 매체적 속성(올 오버 페인팅)만을 강조하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미니멀리즘) 말들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마띠에르의 이중적 뜻이 그러하듯, 형상과 물질의 관계는 결코 견고하지도,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매끈한 표면일지라도 그 표면에는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균열들이 존재하며, 완전히 숨겨지지 않는 그 균열은 찢어짐 속에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균열은 오브제의 두터움과 얇음, 거침과 부드러움, 육중함과 가벼움을 결정하는 동시에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은 우리의 시선을 균열 속으로 계속해서 인도한다. 즉 물질과 형상은 분리되는 것도, 원인과 결과도 아니다. 두 요소는 선후 관계 없이 계속 역전을 거듭하며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이것은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는 근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근원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그 표피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표면은 껍데기가 아니라 피부다. 재질, 질감과 두께, 미온, 그 밑으로 뛰는 심장의 박동과 고요한 숨소리까지, 모든 내재적인 힘은 피부의 갈라짐과 균열, 높고 낮음, 거침과 부드러움 사이에서 드러나는 마띠에르를 통해,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도달한다.  

박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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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세의 어린 무용수(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밀랍, 실크, 모슬린 등, 98cm, 1881.

오리지널 왁스 작품은 단 하나이며, 오늘날 세계의 도처에 존재하는 28개의 청동 조각은 드가 사후 주조된 것이다. 






곽인탄
인간의 손으로부터 탄생했음을 숨기지 않는 곽인탄의 거친 형상들은 미술사의 여러 참조점들을 끝없이 접합하고 해체해 온 결과물이다. 실제 역사적 연결고리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선호에 따라 느슨하게 선택된 작업들은, 작가의 손을 거쳐 결합하고 뭉개지면서 강박적으로 그 크기만을 키워나간다. 더이상 어떤 기존의 작업도 연상하기 어렵게 된 그의 작업은 생산과 파괴의 경계에서 계속해서 요동친다.

박서우
박서우의 작업은 영상의 마띠에르에 대해서 질문한다. 영상 매체가 영상이라고 결정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의 작업은 서사와 형식, 편집, 기술, 설치, 빛, 화소 등을 계속해서 실험하며 그 애매모호함을 더듬어 나간다. 관객은 분절된 화면의 이동과 정지, 관계없어 보이는 화면들의 끝없는 몽타주 속에서 찰나 발하는 이미지적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정중원
우리가 마주한 초상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이들의 파편이다. 정중원이 그려낸 인물의 모공과 주름, 흔들리는 피부 결은 세부로부터 어떻게 전체가 재현되는 지를 질문한다. 작가는 여러 레퍼런스를 통해, 실제로는 그 존재를 확언할 수 없는 인물들을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실제와 상상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세부의 표면을 관찰하기를 종용한다.

한성우
한성우의 붓질은 벽을 그리는 행위인 동시에, 물질을 쌓아 벽을 생산하는 행위이다. 작가는 벽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쌓아가는 방법을 흉내 내듯, 붓을 사용해 물감의 두께를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층층이 쌓이는 터치들은 캔버스 위에 벽이라는 형상을 그리는 작업이면서, 벽을 제작하는 과정이 되고, 벽의 균열을 일구며, 회화의 균열을 드러내는 지점이 된다.

황수연
황수연은 오랫동안 물질을 더듬는 방식에 천착해 왔다. 모래, 은박지, 종이 등의 재료를 거쳐 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는 3D 프린터 필라멘트를 통해 그 가소성의 실험을 지속한다. 폴리 필라멘트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이루는 결과의 형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성질을 감추는 데 급급한 대표적인 실험용 재료이다. 작가는 최종의 형상을 가장 일상의 오브제로 설정하여 조각이 자라나고 무너지는 순간에 보다 집중하고자 한다.


전시는 회화와 조각, 영상 매체에 대한 구분보다는, 이미지의 마띠에르 자체에 다가서는 경험을 구성한다. 곽인탄은 데드 마스크를 변형한 조각을 통해 신체 너머를 재현하고, 황수연은 기하적 형태를 엮어낸 유체적 조각을 통해 물질의 표면을 제시한다. 정중원은 여러 레퍼런스를 딛고 그려낸 극사실적 초상화에서 실제와 재현에 대한 화두를 던지며, 한성우는 물감의 물성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켜 회화적 균열을 극대화한다. 한편, 박서우는 영상적 실험을 통해 매체의 조건에 대해 다루며, 영상의 마띠에르가 무엇일지에 대해 질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