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
2025. 10. 12 - 10. 26
장소 | 온수공간 2,3층
관람시간 | 12 - 7PM, 휴관없음
서문 | 콘노 유키
디자인 | 모닥불
사진 | studio18
주최·주관 | 원소윤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025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입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상기와 망각의 물살 속에서
콘노 유키
그래도, 시간은 그래도 흘러갔다. 어찌저찌 지나간다는 점에서 모든 삶은 환영과도 같다. 반복되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던 때도 이미 많이 지나갔다. 언어와 기억 상실을 겪은 할머니는 나의 이름을 공백으로 남겨두셨다. 나를 만날 때마다 그 공백을 정확한 이름과 정확하지 않은 이름으로 채우셨다. 그런 할머니를 나는 할머니라 불렀고, 세상을 떠난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라 부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살아 계실 때,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어쩌면 모든 이름은, 이름이 주어진 모든 것은, 지금의 대상을 특징짓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떠나고 난 후의 시점을 대비하는 자세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존재들은 상실 너머—그러나, 이편—에 있다. 망각의 저편에서 호출될 때, 우리는 들려온 이름과 부르던 이름에 귀를 다시 기울인다. 그 시제는 항상 지금이고, 그곳은 매번 이곳이다.
비워진 벽에 드리워진, 혹은 커튼 너머 보이는 그림자처럼 회화가 거기에 있다. 개인전 《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온수공간)에서 원소윤은 흐릿한 형상에 기억을 담는다¹. 가까이 다가가 봐도 상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하필 원소윤은 그가 찍은 원본 사진만큼 선명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기록해 놓은 사진들은 부재를 대비해서,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회화는 다시 존재함을 위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닐까—무엇의 존재함? 그림자처럼 남은, 흔적으로 남은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도록. 이미 지난 장면과 뒤로 물러선 경험, 그리고 떠난 존재가 다시 있을 수 있도록. 원소윤은 상실과 기억 사이에서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을 회화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희미해지는, 스며들듯 배인 이미지는 멀리서 볼 때 상을, 윤곽을 서서히 잡아간다. 생각도 못 하게, 소중했던 순간은 늘 뒤늦게 소리 내어 말하고 싶어진다—속삭임이나 독백, 심지어 여러 번 반복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선명하지 않은 것은 선명함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지 않더라도 다가가고 싶은 상태에 머무른다—우리를 머물도록 한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기록된 사진에서 출발한 작업에서 치매를 앓던 할머니와 그를 돌본 가족과 친척, 그리고 원소윤의 시선은 선명하지 않음을 향한다. 큰 화면에 구체적인 사물을 하나씩 배치하고 서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작가는 연하고 부드러운, 옅은 색으로 그려간다. 그려간다는 구체적인 행위가 보는 사람 시선에 내맡겨지기라도 하듯, 이미지는 그림자처럼 어슴푸레 나타난다. 종이에 스민 형상은 퇴색하는 과거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떠오르듯이 이쪽을 보고 있다. 기록이 선명함을 (우리에게, 기록 자체에) 가져다준다면, 기억은 (우리에게, 기억 자체에) 불투명함을 가져다준다. 불투명함에서 출발하는 기억에서, 망각과 상기의 시제는 항상 미래를 향한다. 원소윤의 회화에는 보는 이의 지금과 원소윤의 두 미래가 동거한다. 우리는 회화에 가까이 다가간다. 화면에 나의 시선, 그리고 그림자가 잠시 겹쳐진다. 그리고 다시 멀어진다. 할머니의 시선(시력)과 할머니의 기억 상실, 그리고 원소윤의 기억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할머니를 한 화면에 다층적으로 겹쳐본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애도²가 비어 있는 곳을 맴돈다. 한 사람을, 그 사람이 머물던 곳을, 그리고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을 그리워할 때, 우리는 항상 비어 있는 곳에 있다. 사람이 떠난 집, 그의 부재, 이름이 사라진 곳—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있었음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이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대상을 소환하게 된다. 상기와 망각이 만든 물살에 기억은 고요히 메아리친다. 그 사람과 그 순간을 다시 불러보고 싶을 때, 비어 있는 곳에, 깔끔히 정리된 곳에, 그림자가 은은히, 그러나 확실히 드리워진다. 내 발밑을 떠나지 않고 따라오는 그림자가 보조를 맞춘다. 무거운 발걸음도 가벼운 발걸음도 언제나 나를 따라온다. 멀리 있다 가까이 다가가 다시 멀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원소윤의 회화를 마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억을 반복하고, 우리의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1]원소윤의 작업에 직접 등장하는 소재는 치매를
앓던 할머니 주변에 놓였던 메모, 할머니 집을 정리하면서 붙였던 메모,
할머니 집에 있었던 그의 물건이이다. [2] 원소윤과 필자의 대화에서. “애도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라는 작가의 질문을 필자가 다시 물어보고 들은 답변이다.
장소 | 온수공간 2,3층
관람시간 | 12 - 7PM, 휴관없음
서문 | 콘노 유키
디자인 | 모닥불
사진 | studio18
주최·주관 | 원소윤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025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입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상기와 망각의 물살 속에서
콘노 유키
그래도, 시간은 그래도 흘러갔다. 어찌저찌 지나간다는 점에서 모든 삶은 환영과도 같다. 반복되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던 때도 이미 많이 지나갔다. 언어와 기억 상실을 겪은 할머니는 나의 이름을 공백으로 남겨두셨다. 나를 만날 때마다 그 공백을 정확한 이름과 정확하지 않은 이름으로 채우셨다. 그런 할머니를 나는 할머니라 불렀고, 세상을 떠난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라 부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살아 계실 때,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어쩌면 모든 이름은, 이름이 주어진 모든 것은, 지금의 대상을 특징짓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떠나고 난 후의 시점을 대비하는 자세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존재들은 상실 너머—그러나, 이편—에 있다. 망각의 저편에서 호출될 때, 우리는 들려온 이름과 부르던 이름에 귀를 다시 기울인다. 그 시제는 항상 지금이고, 그곳은 매번 이곳이다.
비워진 벽에 드리워진, 혹은 커튼 너머 보이는 그림자처럼 회화가 거기에 있다. 개인전 《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온수공간)에서 원소윤은 흐릿한 형상에 기억을 담는다¹. 가까이 다가가 봐도 상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하필 원소윤은 그가 찍은 원본 사진만큼 선명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기록해 놓은 사진들은 부재를 대비해서,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회화는 다시 존재함을 위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닐까—무엇의 존재함? 그림자처럼 남은, 흔적으로 남은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도록. 이미 지난 장면과 뒤로 물러선 경험, 그리고 떠난 존재가 다시 있을 수 있도록. 원소윤은 상실과 기억 사이에서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을 회화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희미해지는, 스며들듯 배인 이미지는 멀리서 볼 때 상을, 윤곽을 서서히 잡아간다. 생각도 못 하게, 소중했던 순간은 늘 뒤늦게 소리 내어 말하고 싶어진다—속삭임이나 독백, 심지어 여러 번 반복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선명하지 않은 것은 선명함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지 않더라도 다가가고 싶은 상태에 머무른다—우리를 머물도록 한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기록된 사진에서 출발한 작업에서 치매를 앓던 할머니와 그를 돌본 가족과 친척, 그리고 원소윤의 시선은 선명하지 않음을 향한다. 큰 화면에 구체적인 사물을 하나씩 배치하고 서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작가는 연하고 부드러운, 옅은 색으로 그려간다. 그려간다는 구체적인 행위가 보는 사람 시선에 내맡겨지기라도 하듯, 이미지는 그림자처럼 어슴푸레 나타난다. 종이에 스민 형상은 퇴색하는 과거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떠오르듯이 이쪽을 보고 있다. 기록이 선명함을 (우리에게, 기록 자체에) 가져다준다면, 기억은 (우리에게, 기억 자체에) 불투명함을 가져다준다. 불투명함에서 출발하는 기억에서, 망각과 상기의 시제는 항상 미래를 향한다. 원소윤의 회화에는 보는 이의 지금과 원소윤의 두 미래가 동거한다. 우리는 회화에 가까이 다가간다. 화면에 나의 시선, 그리고 그림자가 잠시 겹쳐진다. 그리고 다시 멀어진다. 할머니의 시선(시력)과 할머니의 기억 상실, 그리고 원소윤의 기억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할머니를 한 화면에 다층적으로 겹쳐본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애도²가 비어 있는 곳을 맴돈다. 한 사람을, 그 사람이 머물던 곳을, 그리고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을 그리워할 때, 우리는 항상 비어 있는 곳에 있다. 사람이 떠난 집, 그의 부재, 이름이 사라진 곳—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있었음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이 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대상을 소환하게 된다. 상기와 망각이 만든 물살에 기억은 고요히 메아리친다. 그 사람과 그 순간을 다시 불러보고 싶을 때, 비어 있는 곳에, 깔끔히 정리된 곳에, 그림자가 은은히, 그러나 확실히 드리워진다. 내 발밑을 떠나지 않고 따라오는 그림자가 보조를 맞춘다. 무거운 발걸음도 가벼운 발걸음도 언제나 나를 따라온다. 멀리 있다 가까이 다가가 다시 멀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원소윤의 회화를 마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기억을 반복하고, 우리의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