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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20 - 9. 02



장소 | 온수공간 2,3층
관람시간 | 12 - 7PM, 휴관없음

참여 작가 | 김가은, 박태호
글 | 허승주
디자인 | 김경수
협력/후원 | 온수공간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별도의 예약없이 방문 가능합니다.
*주차는 인근 유료주차장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어느 날 괄호 안의 말들을 지우자 ()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괄호와 괄호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맞붙은 이것이 0으로 읽힐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말들을 세밀히 쌓아서 글을 쓰고 싶다만 쏟아지는 생각들을 지면의 모서리에 묶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잇따라 쓰였다 지워지는 말들은 종이 위에 옅은 자국만을 남기고는 백지의 상태로 수렴하였다. 
망설임, 모호성, 의문에 연루되어 원형의 에코 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다.

이럴때면, 나는 ()의 가운데에 열려 있는 엷은 여백 사이로 어떤 상상을 한다. 쓰기가 지우기가 되고, 지우기가 쓰기가 되는 이 원형의 공간에서 공회전하는 말들은 여백의 끝에 있을 누군가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에코와 같이.

상상 속 누군가를 생각하면 왜인지 그리운 마음이 들고,
말들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아서.
아마도 이 글은 지워질 것이다.

그때 나는 원이 지닌 마법적 의미를 깨달았다. 열에서 이탈했을 때는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열은 열린 조직이다. 하지만 원은 닫혀서, 떠나면 돌아갈 수가 없다.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떨어져 나온 돌이 원심력에 실려 가차 없이 멀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처럼 나는 원에서 떨어져 나왔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락하고 있다. 맴돌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추락 끝에 박살이 나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들(나도 이들 가운데 속한다.)은 마음속에 잃어버린 원에 대한 수줍은 향수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모든 것이 원을 그리고 도는 세상의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민음사, 2022, 130p

내가 미술대학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말을 끊지 않고 영원히 듣는 법일 것이다. 캄캄하고 습한 오전 11시, 컴컴했지만 가끔 반짝이는 말과 조형이 오가던 교실에 우리가 있었다. 깨끗한 적 없던 곳 먼지의 존재를 굳이 일깨우는 하얀 햇빛과 모국어에 거리를 두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지나갔다. 누군가는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운 오전을 경유하며 창작행위를 향한 열망에 대해 되짚어본다. 그 욕망은 고결하고도 너무나 연약해서 그것이 나에게 너무나 필요하다고 느껴지다 가도 고개를 돌리면 굉장한 사치처럼 여겨지곤 한다. 창작을 지속하려는 마음은 원의 주민이 추락의 공포를 상상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내가 이러한 불안을 직선과 사각형 뒤로 숨긴다면 가은과 태호는 무언가 지워진, 표현되기 이전의, 어쩌면 표백된 하얀색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숨기고 머뭇거린다.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망설이며 쥐고 있던 이야기가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다 보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잊어버리고 끝내, 마침내, 어쩔수 없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완결성을 가질 수 있다고, 어떤 일을 시작하고 끝맺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소진되듯 쓴 일기에서 애써 꾹 눌러쓴 글씨를 지우며, 일기를 쓰기 전 샤프심을 얇게 가다듬는, 하얀 블라인드 아래로 들이치는 햇빛을 응시하는 둘을 떠올린다.
완결되어 버리는 괄호를 끝없이 경계하면서, 또한 언젠간 완결한 원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허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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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공간 2025 오픈그라운드 공모 당선작 I